2018년 식목일 전후였던 것 같아요. 시골에 내려가 살기로 결심했을 즈음이었죠. 서울에서 문경으로 내려와 그리고다에 심을 나무를 사러 근처 농원에 들렀습니다. 오랜 시간 서울에 살며 도시의 익명성을 사랑하던 저는 옆집 어르신 댁 창문 너머로 저희 집 앞 텃밭과 마당이 훤히 보인다는 사실이 좀 불편했어요. 그러던 차에 농원에 가니 사장님께서 울타리 용으로 좋은 쥐똥나무를 소개해 주셨고 저와 동생은 그 나무로 옆집 어르신 댁과 저희 집 사이에 경계를 칠 예정이었지요. 스무 그루 정도 사니 사장님이 수국 나무 하나 가져가라며 덤으로 주셨어요. 회사원 시절, 지하철 역사의 꽃집에서 볼 때마다 참 예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비싼 가격에 선뜻 손이가지 않던 꽃인데 그리고다에서 주렁주렁 달릴 모습을 상상하니 신나서 냉큼 받아들었습니다.
그 길로 그리고다에 들어와 힘차게 경계를 치기 시작했어요. 앞밭과 맞닿은 옆집과 나란히 줄을 맞춰 삽질을 했습니다. 허벅지까지 오는 작은 친구들이었지만 어서 제 키만큼 자라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길 바리며 깊게 파서 심고 물도 흠뻑 주었습니다. 덤으로 얻은 수국 나무도 뒷밭 한자리를 차지했죠.
그게 얼마나 무지한 일이었는지는 몇 가지 사건이 있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어요. 요즘도 가끔 일어나는 정전과 단수가 처음 일어났을 때였지요. 도시에선 인터넷이 한 시간만 끊겨도 난리가 나지만 몇 가구 없는 시골에선 인터넷은 고사하고 물과 전기가 끊겨도 평온하더라고요. 오히려 어르신들은 물과 전기를 아껴 쓰시는 게 몸에 배어 물이나 전기가 끊기고 한참 뒤에야 알게 되실 때가 많았어요. 화장실 물이 내려가지 않으면 난리가 나는 저와 동생과 달리 어르신들은 "이장한테 말해놨으니 기다리면 고쳐지겠지~" 하시곤 느긋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며 급한 대로 수돗가에 모아둔 물을 쓰고 외부의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하셨지요. 이렇게 모든 게 느긋한 시골에서 전기나 물이 끊기면 몸 닳는 사람은 저와 동생이었어요. 그래서 뭐가 안될 때마다 옆집 어르신께 쪼르르 달려가 “할머니 물이 흙탕물이에요”, “할아버지 물이 안 나와요” 하면서 아쉬운 소리 할 때가 많았죠. 단수나 정전 문제뿐만 아니라 마을 물탱크 청소나 마당 한켠의 정화조 청소 업체를 찾는 일처럼 생전 처음 보는 일들을 대할 때도 쪼르르 어르신 댁을 찾아야 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찾아오는 옆집 아가씨들이 염치도 없이 쥐똥나무로 어르신의 조망권을 해치고 있으니 참 야속하셨을 거예요. 도시에서 온 처자들이라 싫은 소리는 못하는데 내심 얼마나 섭섭하셨을까요?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건넛 마을 어르신께서 “마당에 나무 그렇게 심으면 안 돼~”라는 말을 듣고 너무나 창피하고 죄송해서 쥐똥나무를 다 잘라내버렸어요.
문제는 쥐똥나무의 생명력이 광대나물 저리 가라였단 거예요. 거기다 제가 얼마나 깊이 심었는지. 뿌리가 너무 깊어 잘라내고 잘라내도 바닥에서 계속 새 줄기를 내더라고요. 덕분에 저는 손이 바들바들 떨릴 때까지 쥐똥나무 톱질하는 헛일을 2018년 이후 매 분기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참 당연한 배려인데 시골에 내려오기 전 내내 도시에만 살던 저는 몰랐어요. 시골에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부끄럽지만 저의 무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뒷밭에 심은 수국은 심을 때부터 제법 큰 상태여서 이듬해 봄에 바로 뽀얀 꽃을 피웠어요. 뒷집 할머니는 왜 저 열매도 안 달리는 나무를 밭 한 중간에 심었냐고 하셨지만 빼곡하게 난 뽀얀 수국이 너무 예뻐 개의치 않았죠. 하지만 그렇게 핀 수국이 지고, 그 해에만 제 키를 훌쩍 넘도록 폭풍 성장하자 문제가 생겼어요. 이상하게 이 수국 나무의 줄기는 옆으로 퍼지지 않고 한없이 위로 쭉쭉 올라갔고, 이파리만 남은 풍성한 수국 나무의 그림자 덕분에 뒷밭에 심었던 다른 작물이 웃자라거나 볕을 못 봐 죽게 된 것이지요. 덕분에 쥐똥나무 가지를 정리할 때마다 수국 나무도 함께 정리하게 되었고요. 그렇게 몇 년 후 봄, 동그랗게 무리 지어 핀 수국이 너무 예뻐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니 한 독자님께서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작가님.. 그거 수국 아니고 불두화예요..”
'망할, 가뜩이나 뒷밭 농사를 망하게 하는 나무였는데 이게 내가 알던 수국이 아니고 불두화였다니' 어쩐지 이상하게 봄에 핀다고 했고, 이상하게 흰 꽃잎만 나온다고 했어요. 그쯤 되니까 저 얄미운 불두화나무를 몽땅 뽑아내고 그냥 상추나 심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뽑으려고 하는데 역시나.. 제가 참 튼튼하게도 심었더라고요..
그렇게 쥐똥나무와 불두화라면 넌더리를 치고 있는데 언젠가 작가님 인스타에서 불두화 이야기를 보게 되었어요. 뭉게 뭉게 핀 이웃집 불두화 담장이 부러워 수풀집이 생기고 가장 먼저 심으신 나무가 불두화였단 내용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