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맞아요. 그 자격시험이 오늘 제가 응시한 ‘식물보호산업기사’입니다. 각종 식물병, 해충, 농약, 잡초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서 여러 문제상황을 진단하고 방제할 수 있는 자격시험이에요. 그런데 기사나 산업기사 시험에는 응시자격이 있습니다. 시험을 보기 위해서 관련학점을 이수하거나 실무경력을 쌓아야 하는 것인데요. 운 좋게도 제가 졸업한 환경학과가 관련학과로 분류되어 있더군요. 졸업 후 십몇 년간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말이에요.
진짜 문제는 시험에 응시하기로 마음먹은 날, 올해 시험접수가 모두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한 해에 딱 세 번 있는 시험접수가 끝났더군요. 바로 이틀 전에요. ‘글이나 열심히 쓰라는 뜻인가’하며 포기하려는 순간, 빈자리 접수라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접수를 받고 남은 자리에 추가 접수를 받는 것입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했지만 접수 날짜에 무사히 접수를 마쳤습니다. 식물보호기사는 자리가 없었지만, 식물보호산업기사는 빈자리가 남아있더군요. 작가님이 좋아한다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어차피 이럴 운명이었어!’
사실 기사∙산업기사 자격증은 대학 시절에 간절히 필요했어요. 이 자격증이 있으면 학과에서 장학금도 주고, 과제를 면제해주기도 하고, 취업할 땐 가산점을 주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동기들, 선배들 모두 여러 기사시험에 매진했습니다. 수질환경기사, 대기환경기사, 토양환경기사, 자연생태복원기사……. 합격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고, 쌍기사(기사 자격증이 두 개 있는 친구들을 쌍기사라고 불렀습니다)도 드물게 있었어요. 그게 저는 아니었지만요.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자격증이 왜 필요한가 생각합니다. 장학금, 과제 면제, 가산점 같은 보상도 없는데 말이에요. 시험공부를 하느라 일할 시간이 부족해져 오히려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데 말이에요.
재미와 보람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언갈 하는 과정이 재밌거나 보람차다면, 특별한 보상이 없더라도 시작하고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정 자체가 저에게 보상이니까요. 재미와 보람이 모두 있다면 완벽하지만,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좋더라고요. 그런데 잡초의 이름과 특성을 외우고, 농작물에 발생하는 식물병의 원인을 알아가고, 농약의 잔류독성을 이해하는 과정은 재밌는데다 심지어 보람찼어요. 내내 수풀집 텃밭을 떠올려서일 거예요. 작가님이 계신 문경 그리고다의 텃밭을 상상했기 때문이기도 할 거고요. 문제집에서 광대나물과 쇠비름을 마주할 때마다 어찌나 반갑던지요. 작가님이 알려주신 쇠비름은 시험에 자주 나오는 잡초였어요. 그때마다 작가님의 안부가 궁금해졌습니다.
작가님의 지난 편지는 아주 여러 번 읽었어요. 이 편지를 쓰면서도 거듭 읽었습니다. 어떤 일에 목소리를 내는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알고 있어요. 저는 그런 용기가 없어서 항상 어정쩡한 지점에 머물곤 하거든요. 무력함을 지나 무관심과 냉소로 향하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를 담은 편지를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저도 슬그머니 그 옆자리에 가 앉을 수 있겠어요. 용기와 솔직함으로 만든 그 자리요.
사실 저는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채식을 한다고 밝히지 않아요. 채식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질문들을 많이 받았거든요.
“채식하면 날씬하고 피부도 좋다는데……”
(왜 갑자기 말을 줄이시는 거죠?)
“채식을 해서 그런가? 전보다 예민하고 깐깐해졌어!”
(일할 땐 예전부터 깐깐했어요…)
“채식한다면서 생선이랑 우유를 먹어요?”
(채식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요.)
사실 이런 질문들은 제 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단 걸, 곧 알게 되었습니다(괄호로 표기된 부분은 제 마음의 소리입니다). 언젠가부터 채식을 한다는 걸 굳이 밝히지 않게 된 이유입니다.
저는 몇 년 전 우연히 채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치킨을 배달해서 치맥타임을 즐기던 날이었어요. 치킨 날개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소망이가 옆에 와서 기웃거리는 거예요. 소망이가 아가 고양이던 시절이라 호기심이 많았거든요. 사람 먹는 건 소망이 안돼, 하고 소망이를 잡았어요. 그때 잡은 소망이 다리 감촉이 다른 한 손에 쥐고 먹던 치킨의 뼈 느낌과 너무 비슷한 거예요. 놀라서 치킨을 내려놨습니다. 그게 제 마지막 치킨이자 채식의 시작이었어요.
보통 ‘채식 = 비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비건은 아니에요. 돼지, 소, 닭 등 모든 육류는 먹지 않지만 유제품과 어류는 먹습니다. 보통 페스코(페스코 베지테리언)라고 불려요.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완전 채식(비건)으로 가는 과정에서 페스코를 거치는데, 저는 몇 년째 계속 페스코에 머물러 있어요. 육류를 먹지 않는다는 핑계로 어류와 유제품을 더 많이 소비하는 날도 있습니다. 종 차별에 반대하고 자연에 도움이 되기 위해 채식을 하면서 다른 동물의 알과 젖, 물살이를 먹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하기도 해요. 편지를 쓰다 보니 이 또한 제가 채식을 한다고 밝히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제 용기 내어 말해 볼래요.
“저는 유연한 채식을 단단하게 해 나가고 싶어요.”
자주 비건 라면을 주문하지만, 논 비건 라면도 먹습니다. 그럴 땐 스프에 들어있는 동물성 재료들을 인지한 채 그냥 먹어요. 식당에서 동물성 재료를 확인하고 빼 주실 것을 요청하지만, 나온 음식에 동물성 재료가 섞여 있다면 음식을 거부하거나 버리지 않고 감사히 먹습니다. 단체회식이나 모임이 고깃집에서 진행되는 경우에도, 거절하지 않고 가요. 메뉴나 반찬에서 제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거나 시원한 맥주로 배를 채우고 돌아옵니다.
제가 지향하는 채식생활은 그런 것 같아요. 단단하지 않지만 그래서 유연하게 연결될 수 있는 상태 말이에요. 제가 선택한 채식이, 아직 채식을 선택하지 않은 다른 이에게 불편함과 죄책감을 주지 않길 바라고 있어요. 가끔 저와 한 끼를 나누기 위해 채식을 선택해 준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기쁘고 보람차니까요. 그 한 끼 한 끼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쌓이고 있는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채식을 시작했다는 연락을 받으면, 반갑게 함께 나눌 밥상을 차려요. 그건 진짜 신나고 재밌는 일이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제 채식생활 역시 재미와 보람 덕택에 계속되고 있네요. 요즘 작가님의 재미와 보람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그 답은 9월 다운 바람과 함께 도착했으면 좋겠네요. 오늘의 바람은 청소년 드라마에 나오는 반항아 같거든요. '도대체 나 다운 게 뭔데? 9월 다운 게 뭔데!'
추신. 이렇게 편지를 쓰고 나면 제가 시험에 합격했다고 오해하실까 봐 덧붙입니다. 필기시험이 끝났고, 아직 실기시험이 남아있습니다. 실기시험은 아직 접수 시작도 하지 않았답니다.
2023년 9월 12일
여전히 수험생인 김미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