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앞의 흔들리는 꽃과 풀, 뭉게구름과 따스한 볕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요? 늦은 여름밤 목청 높은 개구리의 울음을, 울창한 나무 사이를 오고 가는 작은 새의 지저귐을, 시골집 주변에 흐르는 맑은 계곡물의 소리를 얼마나 들을 수 있을까요? 이른 아침의 상쾌한 향기를, 해질 녘 달달한 공기 냄새를 얼마나 맡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모든 게 얼마 남지 않은 듯한 체념으로 가득 찬 와중에 작가님의 “그래도 그 해 여름 지나고부터 점점 좋아졌지. 다들 너무 늦었다고 그랬는데, 아주 조금씩이라도 매년 나아졌어”라는 말에 희망을 보고, 기운이 나버렸어요. '어쩌면 이런 풍경을 계속 볼 수 있겠구나, 수풀집의 조록조록 물소리도, 탁탁, 나무 도마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도 계속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기대와, 이 글을 함께 볼 독자님들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낀다면 그럼 그땐 더 큰 희망을 보고 나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쁨에 벅찼어요. 또 작가님의 지난 편지처럼 어쩌면 내가 쓰는 답신이 누군가에게 작은 각성을 줄 수 있겠구나 하며 다시 무언갈 해 볼 힘이 났어요.
하지만 이 답장을 쓰고 있는 8월 23일 제 기분은 너무도 무력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우리가 오늘의 제인 구달만큼 나이를 먹게 되었을 때, 그때 역사는 2023년 8월 24일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저는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희망을 꺾을 수 있다는 걸 어제 목격했어요. 환경운동연합이 5월 25일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5.4%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한다고 해요. 또 응답자의 72%는 해양 방류 후 수산물을 기피하게 될 것 같다고 답했고요. 하지만 이런 결과에도 권력을 쥔 소수의 사람들은 기어코 내일부터 30년간 태평양에 원전 오염수를 버리겠다고 발표했어요. 덕분에 투명한 물에 까만 물감을 풀었을 때의 모습처럼 후쿠시마에서 방류된 물도 태평양 곳곳을 누비겠지요. 사람들은 그 물이 한반도에 2년 뒤에 온다, 5년뒤에 온다 말하지만 그게 언제 오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어쨌건 그 물이 해류를 타고 결국 바다 전체에 퍼지고, 그 물을 바다 생물이, 결국 우리가 마시며 살게 될 건 자명한 사실인데요.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서 이런 분노와 무력함 다음에 어떤 감정이 올지 잘 알고 있어요. 냉소와 무관심이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냥 눈을 감아버리자. 피곤한데 뭐 그렇게 앞으로를 걱정하냐. 나는 우주의 조그만 먼지다. 그러니 당장 행복하자”라는 소리가 올라와요. 거기에 비난과 비관까지 섞이면 이렇게 되어요. “아 맞다. 계속된 어업 활동과 석탄 소비로 어차피 이대로 간다면 수생 동물은 90%가 멸종한다 그랬지? 그럼 잘 됐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덕분에 사람들이 수산물을 기피하게 될 거고, 자연스럽게 어업이 줄어들 테니, 바다 생물한테는 오히려 잘 된 거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전 20세기 최악의 원전 사고인 체르노빌 원전이 터지고, 그곳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후 폐허가 된 자리에 동물이 살게 되면서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처럼, 이참에 바다에서 인류가 떠나고 덕분에 바다에 숨통이 트일지도 몰라. 물살이 입장에선 차라리 방사능 물 좀 마시고, 인간이 떠나가는 게 더 나을 거야” 하고요. 모든 일엔 장단이 있다며 자조하고 합리화하게 되겠죠.
하지만 그렇게 끝내선 안된다는 걸 알아요. 그렇게 끝내기엔 사실 원전 문제가 아니라도 우리는 이미 매 초 착실하게 파괴의 길로 들어서고 있으니까요. 바다가 온통 방사능이 되어 사람들이 해산물을 기피하게 된다고 해도 가만히 있으면 해양생물 멸종은 기정사실일 테니까요. 이대로라면 해양 생물이 멸종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버려진 어망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넷플릭스 다큐 <씨스피라시>에선 바다 쓰레기의 46%가 어업활동으로 버려진 어망이라고 해요. 깊은 바다 속이니 어쩌다 줄이 끊어져도 찾기 힘든거죠. 문제는 그 어망 자체가 아니라, 그 어망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연쇄 작용이에요. 버려진 어망 속 미끼를 보고 들어간 물고기가 들어가 나오지 못해 죽고, 그 사체가 다시 미끼가 되어 다른 물고기도 들어가 또 죽고, 그렇게 쓰이지도 않을 한 어망에서 무한한 죽음이 일어나고 있대요. 지금 이 순간에도요. 덕분에 해양 생물 대 멸종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그러니 움직여야죠. 바닷속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알리고, 그 일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해야죠. 너무 늦기 전에.
하지만 단지 어떤 생물이 멸종된다는 소식으로 개인을 바꾸기엔 한계가 있을 테니 제가 채식을 하게 된 이유를 써볼까 해요. 저는 다이옥신 때문에 채식을 마음먹었어요. 우리가 흔히 쓰는 비닐과 플라스틱을 연소시킬 때 나오는 그 발암물질이요. 비닐이 탈 때뿐만 아니라 농약과 제초제에도 쓰이는 이 다이옥신은 1g의 극소량으로도 2만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물질인데요. 화학적으로 아주 안정된 물질이라 물에는 분해되지 않고 지방에 녹는대요. 그래서 물과 작물에는 축적되지 않고 부유하지만, 그 작물을 먹는 동물의 몸엔 고스란히 쌓이죠. 그렇게 한번 들어간 다이옥신은 배출되지 않고 평생 체내에 머문다고 해요. 단, 두 가지 유일한 배출구인 출산과 수유를 제외하고서요. 그러니 수소는 평생 다이옥신을 머금으며 살 수밖에 없고, 암소는 배출할 수 있지만 출산과 수유뿐이니, 한번 축적된 다이옥신은 세대를 이어가며 계속 소의 몸에 머무르게 되는 거죠. 이 사실을 알고 아니 소의 몸이 더 이상 건강해 보이지 않았어요. 과장해서 말하면 농축된 다이옥신으로 보였달까요. 칼슘으로 가득 찬 줄 알았던 뽀얀 우유가 다이옥신 음료로, 빵은 다이옥신 덩어리가 되었지요. 송아지는 그 다이옥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동물이 되었고요. 이게 제가 육식을 피하게 된 가장 큰 동기였어요. 이기적이게도 내 몸 건강하고 싶어서요.
그렇게 시작된 채식은 시골에 살면서 수소 없이 평생 좁은 우리에서 사는 암소가 얼마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임신이 되고 아이를 낳는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만에 그 아이를 잃는지, 짧은 생 중 임신하지 않은 기간이 손에 꼽는 암소의 삶을 제 눈으로 목도하면서 불완전하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어요. 제 눈으로 본 소의 생애가 일부이길 바라며 찾아보니 지구상 대부분의 소가 사람에겐 쓸 수 없는 고농도의 항생제와 호르몬 주사, 인간의 손에 의한 인위적이고 치욕스런 과정을 통해 태어나더라고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태어난 아기 소의 모습은 그런 과정이 무색할 만큼 아름답죠. 반짝이는 속눈썹 아래 맑은 눈빛, 깡총이는 다리와 쓰다듬어 달라며 내미는 머리, 보송하고 보드라운 갈색 털. 가끔 보는 제 눈에도 이토록 귀여운데 어미 소는 제 자식이 얼마나 귀여울까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과 4~5개월 만에 생이별을 하는 사이, 어미 소의 배엔 이미 지난 번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다른 아기 소가 자라나고 있지요. 시골에서 알게 된 잔인한 표현으로 그렇게 10번 정도 새끼를 빼고 나면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어 버려져요. 죽고 싶어도 10번 남짓한 출산과 생이별을 반복한 후에야 최악이 방법으로 살해되며 삶이 끝나는 암소의 삶을 가까이 보지 않았더라면 이 불완전한 채식조차 이어가지 못했을 거예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다이옥신 덩어리처럼 큰 충격일수록 빨리 잊고 싶어할 테니까요.
이런 글이 축산업과 어업에 종사하시는 분들께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지도 잘 알고 있어요. 이곳에 살면서 어르신들이 소를 키워 파는 게 얼마나 중요한 생계인지도 소의 생애만큼이나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까요. 예전엔 가벼이 뱉었던 “소 안 키우시면 안 되냐”라는 말이 이제는 너무나 무거워졌어요. 멈추라고 말하기엔 이 파괴의 사슬 속에 단단히 묶인 사람들의 삶이 이미 충분히 고단해서 입을 뗄 수가 없어요. 뉴스를 보니 <오늘이 회 먹는 마지막 날>이라는 제목이 헤드라인이네요. 오늘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더 고단해질까요?
그래서 이 사회가 이미 이 죽음의 사슬 속에 엮인 사람들에게 더 나은 업을 찾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아주 큰 관심과 움직임이, 물결이 일어나야 하겠지만, 제가 그걸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동안 비관과 자조로 지냈었지요. ‘애써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욕먹을 짓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되는 행동하지 말고, 그냥 오늘 하루 조용히, 편하게 살자’라는 마음이 제 마음속 날선 언어들을 가라앉혀주었어요. 중요한 문제니까, 내가 아니어도 이 시대를 염려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언젠가 알아서 해결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주 조금씩 내색하며 지냈지요.
근데 작가님의 지난 편지를 읽으며 마음이 바뀌었어요. 용기가 생겼어요.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는 한 사람이 여기 있구나. 그럼 우리 둘이니까, 둘이 한다면 셋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셋이 한다면 넷이, 그렇게 이 글을 쓰기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작은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그 작은 움직임이 물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보았거든요.
대책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제가 참 무책임한 인간이라는 것은 그냥 인정하고 가야 할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책임감 없이 이 날선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겐 원전 오염수를 비판할 자격이 없어요. 애초에 원전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도 그런 원전으로 생산된 전기의 일부일 테니 그 책임이 저에게 없다고 할 수 없죠. 그래서 비난하고 평가할 자격도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우리 모두가 내일 목도하게 될 테니까요. 말하지 않으면 그나마라도 목소리를 내는 자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오늘은 무책임한 말을 써 내려가 봅니다. 쓰고 보니 편지라기엔 무거운 이야기들이 가득 적혀있지만 한편으로는 편지니까 이렇게 쓸 수 있는 듯해요. 작가님과 주고받는 이 서간문이 아니라 책을 낸다고 생각했다면 더 큰 책임감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쓰지 못했을 거예요. 편지니까,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에게 쓰는 삶에 대한 걱정이자 하소연이니까 이토록 솔직하게 써 내려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이 편지는 지난 편지들과 달리 거의 반나절만에, 단숨에 적었어요. 사실 꺼내기 무척 두렵고 무서운 이야기들, 함부로 뱉었다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는데요. 이 편지를 핑계로 꺼내고 나니 오랜 시간 제 속에 잔뜩 쌓였던 말들이 와르르 쏟아졌고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어요. 그리고 그 후련한 마음으로 낙엽이 떨어진 마당을 쓸었어요. 몇 주 전만 해도 익을 새 없이 푸르르기만 했던 한 여름이었는데, 제가 있는 문경은 어느덧 사과가 빨갛게 익기 시작했고, 벼에 쌀알이 통통하게 맺히고. 낙엽도 제법 떨어져요. 여름이 가고 있음이 보이네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처서더라고요. 달큼한 저녁 공기를 마시며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쓸다 보니 그래도 아직은, 자연이 제 리듬을 놓지 않고 계절에 맞게 피고 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모습에 안도하고 싶지만, 안도할 수 없는 내일이 올 테니까 좀 더 씩씩해져 보려고요. 작가님께 이 편지를 전송하고, 훗날 독자들에게 내보일 용기를 내보려고요. 혹시 이대로 메일이 전송되었다면 그건 제가 용기를 낸 것 일 거예요. 비관과 냉소로 눈 감지 않기 위해서, 흘러가는 대로 합리화하지 않기 위해서요. 작가님의 편지를 받아든 제가 이렇게 용기를 내었듯, 이 글을 보는 누군가에게도 작은 용기가 되길 바라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