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받고, 한참 고민했어요. 마침내 이 편지의 꼭대기가 "미리 작가님께"가 된 이유는 "작가"라는 말을 붙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계절 편지 프로젝트의 발단이었던 1월의 어느 날, 제게 디엠을 보내셨지요? 함께 책을 써보지 않겠냐고요. 그때 전 비자림을 걷고 있었는데요. 작가님의 메시지를 보고 2분 정도 고민하다가 바로 하겠다고 답했어요. 이제와 고백하건대 사실 그때 덥석 하겠다고 한 건, 이 일 자체가 제게 남는 장사여서 그랬어요.
작가님의 첫 책,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를 보고 당시 제가 생각한 미리님은, '끊임없이 자연과 주변을 발견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제겐 너무나 익숙해져 완전히 잊고 있던 풍경과 감정들, 이를테면 편지에서 써주신 완두콩 이야기처럼, 저에겐 어느새 당연해진 것들에 대해 작가님은 잘 발견하고 잡아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계시더라고요. 주중엔 서울에, 주말엔 시골에서 머무는 분이라 그 반짝임들을 생경하게 마주할 수 있는 걸까요? 그렇다 해도 그 일을 몇 년 째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늘 새롭게 마주하는 작가님의 시선이 제게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익숙하고 지겹다고 생각했던 네 주변에 사실은 이렇게 좋은 게 많아." "심지어 넌 그걸 매일 누리고 있어" 라고요. 그래서 미리 작가님이라고 쓰기로 했어요. 고루한 일상 속에서 사소한 반짝임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부지런히 쓰는 일, 작가가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다 사석에서 만났을 때 그 생각에 확신하게 되었죠.
알고 보니 작가님은 쓰는 일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거든요. 당시 제게 책을 쓰는 게 꿈이었고 앞으로도 꿈일 것이라고 말하셨었지요. 분명 힘들지만, 그래도 계속 쓰고 싶다고요. 저는 그런 의지를 가져본 적이 없거든요. 얼떨결에, 호기심으로 첫 책을 출간하고 생각했었어요. "이 짓거리 다신 못한다." 이후 4년간의 공백을 두고서야 다시 책을 쓸 용기가 났지만, 그마저도 장문은 엄두가 나질 않아 두번 째 책은 잘하든 못하든 매일 한 컷의 그림과 한 줄의 글만 쓰자는 마음으로 썼어요. 그렇게 두 권의 책을 쓴 지금도 전 여전히 책 내는 일이 내키진 않아요. 머리속에 구름처럼 동동 떠다니는 퍼즐 조각 같은 생각을 글로 붙이는 일, 그걸 다시 찢고 버리고 줍고 펴는 일, 책이 나오고, 어쩌면 내 책의 독자가 되어줄 수 있을 사람들에게 내보이며 유혹하는 이 일련의 과정.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잖아요. 그걸 무수히 반복할 마음이 있는 사람의 글을 월에 한 번씩 마주하면 제가 그의 반이라도 닮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렇게 쓰고 나니 이 책의 시작이 작가님은 저에 대한 호감이었던 반면 저는 철저한 계산이었음을 고백하는 것 같아 부끄럽고 걱정되긴 하지만, 거짓으로는 몇 줄 쓸 수 없을 것이기에 아주 솔직해져봅니다. 맞아요. 저는 이렇게 계산적이었어요. 구부러진 쑥도 삼밭에서 나면 곧게 자란다는 <마중지봉>처럼, 부지런히 자연을 발견하는 작가님과 가까이한다면 저도 제 주변의 좋은 것들을 발견하고 부지런히 쓰는 사람이 되겠지 하면서 함께 하려 했어요. 그러고 보니 벌써 이렇게 장문의 편지글을 썼네요?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고, 작가님을 전보다 가까이서 관찰하며 알게 된 새로운 면모는 작가님은 제가 예상한 것보다 더 알토란 같은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참고로 알토란은 저희 엄마가 마음에 꼭 드는 걸 봤을 때만 쓰는 표현인데요. 엄마가 "알토란 같이 해놨다."라고 말하는 건 모양이나 차림이 아주 다부지고 야무져서 두 번 손 갈 일 없게 만들었단 뜻이에요. 매사에 설렁설렁하고 머물던 자리마다 머문 티가 나는 저로선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죠. 부끄럽지만, 전 서른 중반의 나이에도 뱀이 허물 벗듯 옷을 벗은 그 자리에 두는 습관을 고치질 못했어요. (특히 급할수록요) 하지만 그 알토란이란 표현이 작가님에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수풀집의 정돈된 텃밭을 보면서 수없이 생각했거든요.
'정말 알토란 같이 해놓으셨네'
사진으로만 봤지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텃밭이고 작가님은 분명 "사진처럼 깔끔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실테지만, 작가님께서 매주 독자들에게 보내는 소식지인 <퇴사원 주간 보고> 사진 속 배경은 제가 2018년부터 시골에 살면서 단 한 순간도 만들어 내지 못한 단정한 텃밭이기에 작가님이 얼마나 알토란 같이 밭을 가꾸고 일구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작가님 혹시 잡초를 뽑을 때 호미를 들고 잡초 뿌리까지 캐시진 않나요? 가끔 줄기나 이파리보다 뿌리가 훨씬 더 긴 잡초를 발견하면 끝까지 찾아가 "아휴 이거는 뿌리가 왜 이렇게 길어!"하면서 끄트머리까지 야무지게 뽑아내시고요? 그렇게 모자 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할 때까지 쪼그려서 밭을 정리하시지요? 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아뇨. 놀라지 마세요. 여기 잡초 뽑기에 이토록 성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호미도 필요 없어요. 그냥 보일 때마다 쥐어뜯듯이 뽑고요. 마침 비가 왔던 날이라 뿌리까지 뽑혀주면 고맙고, 가문 날, 땅이 메말라서 줄기만 뜯겨도 그만인 스타일이거든요. 오늘 안에 다 뽑아야지! 하는 의지도 없이 서 너개 뽑다가 동생한테 "그렇게 뽑을 거면 그냥 뽑지 마!" 한 소리 듣고선 감사한 마음으로 포기하는 한 없이 뻔뻔하고 게으른 존재지요.
덕분에 풀밭인지 고추밭인지 상추밭인지 알 수 없을 이런 방임형 텃밭에서도 척척 잘 크는 작물을 가까이하게 되었어요. 토마토, 오이, 고추, 파, 상추, 가지. 매년 저의 집업실 그리고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야채들이죠. 섬세한 관심 없이는 키우기 힘든 까다로운 작물들, 가령 돌 없는 깊고 부드럽고 성글한 흙밭에서 자라야 하는 당근이나, 진딧물에 취약해 주기적으로 방제가 필요한 양대콩 같은 작물은 그리고다의 방임형 텃밭을 견디지 못하더라고요.
이런 제게 작가님의 이웃집 완두가 왔다면 거의 90% 확률로 창고에 두었다가 깜빡한 뒤 때를 놓치고 내후년 즈음 생각나서 심었을 거예요. 그때 되면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져 싹을 틔우기도 힘들겠지만, 틔운다 해도 무관심한 텃밭 주인이 간간히 주는 물에 비해 햇빛이 너무 뜨거워 말라 죽거나 제대로 자라지도 못했을 테죠. 그렇기에 작가님이 쪼글쪼글한 완두를 통통한 과실로 키워내는 데에 얼마나 섬세한 보살핌과 부지런한 관심이 있었을지 잘 알고 있어요. 조그만 작물에게 준 다정함을 이렇게 귀여운 연둣빛 자태로 보게 되니 저도 덩달아 자랑스럽고 대견한 마음이 들어요. 그러니 이쯤에서는 정말 인정하셔야 할 것 같아요. 본인이 알토란같은 사람이란 걸. 그리고 이쯤에서 저는 제 필명이 귀찮이고 작가님의 필명이자 이름이 미리인 것이 너무나 적절하다고 느껴집니다. (역시 운명인가요!)
이렇게 한심한 이야기만 줄줄 써 내려가니 작가님이 저에게 실망할까 봐 멋지고 좋은 이야기도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어쩌죠? 막상 저를 칭찬하는 글을 보태려니... (여기서 며칠을 쉬었습니다.) 숙연해집니다. 허영을 조금 보태서라도 제 좋은 이야기를 하자면 어느덧 퇴사한 지 6년이 되었단 것과 (2017년 12월에 퇴사!) 돌이켜보면 그 시간 동안 어떻게 버텨왔나 싶지만 아무튼 버텼다는 거예요! 이렇게 흘러가듯 사는 인간이 말이죠. 기특하지 않나요? (매년 이렇게 감탄해요! 1년이나 버티다니! 3년이나 버텼다니! 5년이나 버텼어! 하고요) 인스타에 거의 매일(어제 안 올려서 뜨끔합니다) 만화를 쓰고 그려 올린다는 것만 빼면 대부분 그저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았는데 그렇게 회사 없이 6년이나 살아냈다니! 경이로운 수준이지요.
문제는 그래서 제가 어디로 흘러갈지,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이 글을 쓰는 지금조차 몰라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회사원과 귀찮을 병행한 기간까지 셈하면 무려 9년이나 해왔음도 말이죠. 전 대체 어디로 갈까요? 모르겠어요.
이렇게 대책 없는 저의 시선에서 작가님이 프리랜서가 되신 건 조금 달라 보여요. 작가님은 작가님 앞에 온 것은 무엇이든, 그게 작가님의 의지와 상관이 있든 없든, 가꾸는 분인 듯 해서요. 이웃 어르신께 받은 쪼글한 콩을 통통한 완두로 키워내신 것 처럼, 잘 낫지 않고 재발도 쉬운 피부병에 걸려 임보했던 소망이를 건강하고 늠름한 턱시도 고양이로 키워내신 것 처럼, 혈연 지연 학연 그 어느 연도 없는 금산에 터를 잡고 시골집을 번듯하게 고쳐내신 것처럼요. 어딘가로 향하겠단 마음을 먹고, 그 방향을 위해 일상을 꾸린다는 관점에서는 프리랜서도, 직장인도 삶을 가꾸는 방식 중에 하나일 뿐이고 그런 측면에서 작가님은 이미 충분한 경험을 해오셨다고 생각해요. 그런 작가님의 방향안에 제가 얻어걸려서 아주 기쁘고요. 실은 지난 6년간 버틴 게 경이로울 지경인데, 앞으로는 어떻게 버티지? 하는 생각을 오늘 아침에도 했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작가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1년은 버티겠다는 생각에 조금 든든해졌어요. 글이 밥 먹여주는 거 아니지만 제가 이 일을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는 일이 돈이 안 될 때가 아니라 아무 일도 없을 때였거든요. 그래도 쓰고 그릴 일이 있고, 그걸로 마감을 해야한다는 의무가 이 일을 계속 붙들고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기로 하면서 벌써 7년을 버티는 경이를 이뤄낸 것이지요! (짝짝) 덕분에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의 전 제법 기운차답니다?
참고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6월 24일. 일주일 뒤면 상반기가 끝나요. 하지만 전 상반기 내내 방황하다 6월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2023년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어요. 늦었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저만 늦었다고 생각하면 시작할 힘이 나지 않았을 텐데 모내기를 끝낸 농부들이 풍년을 기원하는 명절인 단오가 불과 엊그제였고, 산책 길에 논을 보니 여린 벼들도 이제야 자리를 잡고 자라기 시작했더라고요. 한 해의 가장 중요한 농사인 쌀 농사가 이제 막 시작된 마당에, 상반기 내내 방황하다 이제 막 마음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한 제가 뭐가 늦었겠어요. 그쵸? 전 "어차피 이럴 운명이었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요. 이것도 운명 아닐까요?(역시 운명론자!) 6월부터 작가님과 편지를 주고 받기로 하고, 덕분에 자연을 돌아보다 벼를 발견하고, 그제야 시작할 맘이 든 운명이었을지도요. 6월 내내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제 막 시작한 벼를 보면서 힘을 얻었어요. 작가님도 이렇게 자연에서 수많은 위로와 힘을 얻으시겠죠? 7월의 작가님은 무엇을 보고 어떤 위로를 얻으실까요? 저는 여기 문경의 키 작은 6월의 벼들과 함께 조급함 없는 마음으로 편지를 부쳐요. 작가님이 계신 그곳에서도 분명 조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자연이 있길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