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에서 충남 금산으로 보냅니다 (vol.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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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즈음,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하고는 "좀 더 누워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눈이라도 더 붙이면 좋을 텐데, 그대로 다시 자려다 다시 이부자리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요. 잠을 깨야 한단 핑계로 화면 너머의 세상으로 들어가버립니다. 그렇게 20분 정도 낭비를 하고 나서야 하루가 시작되는 게 며칠 전까지의 일상이었어요. 편지를 부칠 날이 가까워오자, 작가님의 아침이 자주 떠오르더라고요. 눈을 뜨면 시계를 확인하고는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 차를 한 잔 내려 마시고, 익숙한 듯 노트를 펼쳐 모닝 페이지를 적던 모습이요. 작가님이 말했던 여러 면면 중 하나였습니다. 경솔했던 언행을 잊어달라고 하셨지만, 저에겐 배우고 따라하고 싶은 기억밖에 없어요. 덕분에 한 동안 열심히 하다 만 모닝페이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정확히 쓰자면 미니 모닝페이지라고 써야하거나 또는 미니 애프터눈페이지, 어쩔 땐 미니 이브닝페이지로 써야하겠지만요.
어느덧 마지막 편지네요. 지난 1년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제게 일어난 작고 큰 삶의 변화들을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아직 말하지 않은 중요한 변화가 있더라고요. 바로 텃밭 마감입니다. 몇 달 전부터 편지를 쓰려고 앉아 있으면 꼭 텃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편지에 지난 한 달 사이 어떤 꽃이 피었고, 어떤 작물이 잘 자라고, 어떤 작물이 비실대고 있는 지 쓰려면 한번이라도 제대로 시간을 내서 텃밭을 관찰해야 됐거든요. 자연스레 누런 잎과 곁가지를 잘라 주게 되고, 그러다 잡초도 뽑게 되고요. 수풀집 텃밭에서 몇 안되는 잡초를 뽑으며 텃밭 관리의 중요성을 깨우친 이후엔 텃밭 마감이 없더라도 틈틈히 밭을 매는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덕분에 작년까지 작물과 잡초가 뒤엉켜 정글이었던 유월 말 텃밭이 웬일로 제법 단정해요! 방임형 텃밭 농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큰 변화죠? 이게 다 매 달 편지를 주고 받고, 수풀집에 다녀온 덕분이에요!
내친김에 텃밭의 근황도 전해요. 유월 말 그리고다 텃밭엔 벌써 굵은 가지가 열렸고, 적상추는 간간히 잎을 내며 슬슬 추대 세울 준비를, 청상추는 아직도 푸른 잎을 촘촘히 내어주고 있습니다. 케일 잎은 애벌레의 공격을 받아가면서도 손바닥 두개를 합친 것보다 커졌고요. 노각과 백다다기의 노란 꽃도 자잘하게 피었는데 노각은 아직 꽃만 피었지 열매는 달지 못했어요. 이유를 검색해보다가 오이도 가지치기 해야 한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닫고(?) 정리해주었습니다. 청양고추는 필요할 때마다 두어개씩 따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파프리카는 이제야 초록 열매를 냈지만, 고추속 작물을 좋아하는 진딧물이 잎 뒷면에 달라붙어 쪽쪽 빨아들이는 탓에 쪼그라든 잎이 드문드문 보여요. 이럴 때 저는 물 호스의 수압을 조금 세게 틀어 작물을 사정 없이 흔들어 줍니다. 마치 태풍이 온 것 처럼 온 사방으로 팡팡 흔들고 나면 대부분의 진딧물이 떨어지고 깨끗한 잎만 남아요. 일종의 방제 작업이죠. 텃밭이 작으니까 이런 태풍권법(?)이 먹히는 것 같아요.
요즘 저의 애를 태우는 것은 방울토마토입니다. 초록색 방울이 탐스럽게 달리긴 했는데 아직 제 색을 띠려면 한참 남았거든요. 이야기 했던가요? 과일과 야채 통틀어 제일 좋아하는 작물이 방울토마토라고. (토마토도 좋아하지만, 토마토는 키우다가 병들기가 쉬워서 방울토마토를 더 좋아해요) 살뜰한 보살핌 없이도 알아서 쑥쑥 크는 수더분함이 좋고, 한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끝없이 내어주는 풍성함이 좋아요. 몇 개 없을 때도 서너개만 얇게 썰어 얹으면 심심했던 초록빛 샐러드가 화사해져서 좋고요. 올리브유에 구워 먹어도 맛있고, 살짝 데쳐서 껍질을 깐 후 마리네이드로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놓고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먹으면 요즘처럼 더울 때 입맛도 살려주죠. 많을 땐 토마토 소스로 만들어 먹거나 다른 야채들과 볶아 카레로 만들어 먹어도 맛있고요. 그 중 최고는 역시 샐러드에 얹어 먹는 토마토일 거예요. 어떤 샐러드 재료와도 잘 어울리는 아삭하고 짭쪼롬한 본연의 맛. 아, 아무리 생각해도 토마토는 너무 멋진 작물이에요. <멋쟁이 토마토> 노래를 지은 분은 이런 토마토의 멋짐을 간파한 분인 게 틀림 없어요. 이렇게 방토에 진심인 제가 지난 겨울과 봄까지 600g 당 8,000 ~ 9,000원에 눈물을 머금고 사다가 자급자족 토마토 라이프를 목전에 두고 있으니 얼마나 애가 타고 설레겠어요. 그래서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선크림도 안 바르고 나가 밤 사이 방울토마토가 얼마나 익었나 확인하러 간답니다. 참고로 저는 방울토마토를 톱니 과도로 얇게 써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데요, 매끈한 식칼로 자르기엔 크기가 작아 가로로 숭덩숭덩 자를 수 밖에 없지만, 톱니 과도로 자르면 꼭지 부분을 아래쪽으로 두고 세로로 얇게 썰 수 있거든요. 그렇게 꽃잎 모양으로 잘린 토마토 단면은 훨씬 예쁘고 맛있게 느껴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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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그리고다의 아침 식탁입니다)
어제는 "저는 땡볕에 일하는 거 좋아해요" 라던 작가님의 말을 떠올리며 오후 4시부터 전지 가위와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향했습니다. 작가님이 그런 것처럼 챙이 큰 모자를 쓰고, 린넨 소재의 긴 상의와 하의를 입고, 모기 기피제를 칙칙 뿌린 뒤 조금 결연한 마음으로요. 요즘은 선물해주신 제초 호미가 제 빛을 발하고 있어요. 솔직히 두 달 전에 잡초를 뽑을 땐 뿌리가 크지 않고 땅도 고슬고슬해서 어떤 호미로도 힘이 들지 않았는데, 그 새 단단해진 흙 아래로 촘촘하게 자란 뿌리를 뽑는데엔 일반 호미보다 제초 호미가 제격이더라고요. 너무 여린 싹은 조금 큰 뒤에 뽑아야 뿌리 까지 끊기지 않고 깔끔하게 뽑힌다는 작가님의 잡초철학에 공감하며 포크처럼 여러 갈래로 난 작은 호미로 촘촘한 뿌리까지 쑥쑥 캐냈습니다. 제초 호미가 아니었다면 일반 호미로 그 깊은 뿌리까지의 흙을 모두 파 냈을 거예요. (제 손목의 구세주..! 제초호미!)
정리한 잡초 중엔 환장이도 있었어요. 환장이라니, 정말 환삼덩굴에 딱 맞는 네이밍입니다. 저도 환장이 때문에 환장했거든요. 그리고다 옆 밭 구석엔 오래 전 할머니가 심어 두신 더덕이 있는데요(그리고다엔 총 3개의 밭이 있어요, 메인 앞 밭, 옆 밭, 뒷 밭) 금산의 어르신이 일러주신 대로 호미로 드득드득 긁어서 뽑히면 정말 좋겠지만.. 문제는 이 더덕 역시 덩굴이라는 거죠..? (저의 암담한 미래가 보이시나요) 환장의 조화를 이루며 얼기 설기 얽힌 두 친구를 어떻게 떼어내지 고민하다가, 그냥 다 걷어내 버렸어요. 다행히 환장이는 담벼락 너머에 뿌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넘어온 덩굴이고, 더덕은 뿌리 작물이라 뿌리째 뽑히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물론 환장이의 뿌리를 뽑진 못했으니 앞으로도 슬금슬금 담벼락을 넘어올 테지만요. 그럼 또 걷어내려고요. 넘어온 덩굴이 온 밭을 뒤덮지 않게.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창작자가 되겠단 생각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네이버 포스트에 첫 게시물을 올린 게 2015년 8월 30일이더라고요. 어느덧 귀찮으로 활동한지 10년 차가 되었습니다. 8년차, 9년 차일 때만 해도 빨리 10년 차가 되어서 "이 힘든 콘텐츠 업계에서 그리고 쓴지 10년이 되었다!"라고 떵떵거리고 싶었는데 막상 10년 차가 되니 어쩐지 주눅이 들더라고요. 10년이나 했는데 아직도 막막해서요. 심지어 요샌 예전보다 더 막막하더라고요. 그나마 지난 10년은 가진 걸 털어 쓰기라도 했지, 앞으로는 뭘 털어 쓰나 싶어서요. 그래서 뭔갈 하기도 전에 벌써 질리더라고요. 나 스스로에게. 지금도 하고 있는 자기복제에. 요 근래 이 생각으로 며칠 내리 아무것도 못했어요. 멈추면 지금까지 해왔던 걸음도 잃는 게 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반복된 제 모습에 지쳐 멈출 수 밖에 없었거든요.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그렇게 멈추면 휴식이라도 되길 바랐는데 막상 멈추니 막막함과 불안함만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틈만나면 텃밭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대로 퇴보하는 제 자신을 마주하기 싫어서. 흙 파고 풀 뽑으며 잠시라도 잊고 싶어서요. 그래도 이렇게 도망갈 수 있는 텃밭이 있단 사실이 불안하고 막막한 일상의 유일한 낙이었어요.
며칠 전 그렇게 매일 텃밭으로 도망치다 발견한 게 있어요. 빼곡한 잡초 사이의 조그만 꽃봉오리, 지난 달에 심은 수레국화였습니다. 분명 잡초는 완전히 없애고 수레국화만 심었는데도 꽃봉오리 주변으로 빼곡히 나 하마터면 수레국화까지 뽑을 뻔 했어요. 작가님의 말처럼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난 잡초들을 원망하다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있었다면 불안만 심겼겠구나'
심지 않아도 매일 심기는 게 불안이라면, 그래서 없앨 수 없다면, 수레국화씨처럼 뭐라도 같이 심어야겠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훗날 불안과 함께 작은 꽃도 필테니까요. 그 이후 저는 매일 이런 마음들로 정체기를 추스리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에 불안만 심긴 싫단 마음, 어차피 심길 불안, 뭐라도 쓰고 그려 함께 심자는 마음으로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계절 부지런히 주고 받은 스물 네번의 편지는 불안과 함께 심은 근사한 꽃씨였던 것 같아요. 한편으론 그럴 수 있어서 얼마나 행운이었나 생각합니다. 이토록 수동적인 인간이 편지 덕분에 의무감을 갖고 부지런히 글을 쓰며 저도 모르는 사이 꽃씨를 심을 수 있었거든요.
오늘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는데 라디오에서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이란 노랫말이 나오는 윤상의 <달리기>가 나오더라고요. '하필 마지막 편지를 쓰는 날에 이 노래를 듣네'라며 피식 웃다가 갑자기 울컥했어요. 틀림없는 끝이 왔고, 이 편지를 부치고 나면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을 건데, 그런데 정말 아쉽더라고요. 아마 자신이 없기 때문일 거예요. 이런 의무 없이 누군가에게 선뜻 먼저 연락해서 작은 일상을 나눌 용기가. 그래서 우리가 나누었던 사소한 이야기들. 너무 덥다고, 거기도 덥냐고, 가을이라 마음이 허전하다고, 동파 조심하라고. 날이 제법 따뜻해졌다고. 산책길에 예쁜 꽃을 봤다고.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이 이제 보니 얼마나 애틋한지 모르겠어요. 편지라는 핑계가 없었다면 아마 한 다섯번쯤 망설이다가 결국 연락 못 할 제가 편지 덕분에 먼 곳의 작가님과 가까이서 지낼 수 있어 행복했어요. 이제 작가님과 주고 받을 편지 없이 혼자서 텃밭을 매려니 벌써부터 외롭긴 하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해보려고요. 작가님 덕분에 이게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더러는 용기도 내볼게요! 먼저 카톡할 용기! 하지만 이 편지를 부치고 또 마음이 쭈글해져 연락 못할 저를 위해 작가님께 작은 쿠폰 하나 남기고 가요. 언제든 작가님이 사용하고 싶을 때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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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프로젝트가 미리와 귀찮이 만드는 매듭이란 생각을 자주 했는데요, 작가님이 먼저 한쪽 줄을 잡아 매어 준 덕분에 저는 그 줄을 보고 쉽게 다음 줄을 맬 수 있었어요. 솔직히 정말 쓰기 싫고 힘들었던 날도 부지기수였지만, 그래도 '작가님의 편지를 읽고 그에 대한 답을 쓰자' 라는 생각으로 쓸 수 있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매듭을 이제 마무리 지어요. 작가님, 이 프로젝트를 끌고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부지런히 자연을 발견하는 미리님과 가까이한 덕분에 저도 제 주변의 좋은 것들을 발견하고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었어요. 편지는 이렇게 끝나지만,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면 외롭고 불안할 때마다 두고 두고 들춰 볼 다정한 편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 때마다 편지를 들춰보면서 떠올릴게요. 금산의 친구를. 그 친구의 반짝이는 시선을. 부족하지만 그 친구에게도 문경의 어느 작은 마을 이야기가 마음의 안식처가 되길 바라요.
가끔 날씨 핑계로 안부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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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언제나 수풀집과 금산의 어르신들, 소망이, 그리고 미리 작가님이 안녕하길 바라는
미리의 계절 친구, 윤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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