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에서 충남 금산으로 보냅니다 (vol.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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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마다 잎이 무성해져 바람이 불면 큰 물결처럼 흔들리는 바야흐로 5월입니다. 5월은 이름만 불러도 참 예쁜 달 같아요. "오"월! 지난 편지의 내용처럼 꽃나무 중 절반이 모두 5월에 꽃을 피워서일까요? 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숫자가 5라서 그럴까요? 좋았던 일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론 조금 힘들었던 달이었는데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반짝이는 것 같고 거니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달은 역시 5월인 것 같아요. 오늘 산책하는데 양지마 할머니가(tmi. 해가 잘 드는 양지에 있는 마을이라 양지마라 불러요. 그리고다는 음지마에 있어요) 그러시더라고요. "요즘 나는 꽃보면 예뻐서 밥 안 먹어도 배불러" 역시, 그래서 5월이 생각만해도 기분 좋은 달인가 가봐요. 이런 예쁜 달에 태어난 작가님,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요!
5월의 작가님이 그렇듯 저 역시 요즘은 산책이 일상의 큰 기쁨입니다. 겨울엔 하루에 한번 이었던 산책을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해질녘에 한 번씩 하게 돼요. 신선한 아침 공기를 가득 마시고 싶고, 거닐다 보면 훅 들어오는 꽃 향기로 발걸음을 멈추고 싶고, 적당한 더위의 볕도 한껏 느끼고 싶고, 분홍빛이 하늘에 촥 퍼지는 노을도 보고 싶어서요. 작가님이 지난 편지에서 말해주셨던 하얀 찔레꽃과 아카시꽃, 개망초는 물론이고 노란 돌나물꽃과 애기똥풀꽃, 연보라빛 나팔꽃, 자주빛 엉겅퀴가 매번 새롭게 반겨주는 데다 곳곳에 달콤한 열매도 달렸는데 어떻게 이 계절에 집에만 있을 수 있겠어요. 바람, 꽃, 볕 온갖 구실을 핑계로 틈만 나면 나가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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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다의 뒷산 갈래길 중엔 제법 큰 오디나무가 양쪽에 자라는 길이 있는데요. 평소엔 그 길로 잘 다니지 않지만 5월이 되면 오디 때문에 일부러 매일 그 길로 다니면서 타이밍을 재요. 연두빛이 쪽빛으로 익어가는 시간은 길고도 긴데, 익고 난 오디는 금세 툭 떨어져 오디의 때를 놓치면 이 달콤한 열매를 먹어 보지도 못한 채 5월을, 그렇게 오디를 먹지 못한 한 해를 보내게 되거든요. 오늘도 가보니 여전히 드문 드문 연두빛이더라고요. 좀 더 익어야 하나보다 하고 지나치려는데 마침 작은 새가 날아와 제 인기척에도 아랑곳 않고 톡톡 오디를 쪼아 먹는 것 아니겠어요? 그제야 땅을 보니 벌써 떨어진 오디로 점박이 바닥이 되어 있었어요. 연두빛 오디 사이로 잘 익은 오디를 골라 먹으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5월의 맛이었습니다. 작은 새와 나란히 오디 몇 알을 나눠 먹고는 앞으로는 하루에 세 번씩 이 길을 지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똑똑 따 먹는 재미를 느낄 날도 며칠 안 남았을테니까요. 어디 오디뿐만 일까요. 뒷산엔 산딸기도 한창입니다. 어느 길목이라고 할 것도 없이 가는 길목마다 산딸기 넝쿨이 빨갛고 동그란 과실을 조롱조롱 달고 있어요. 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익었겠지 하고 주황빛이 도는 산딸기를 따먹었다가 지릿할 정도의 신맛을 제대로 봤는데요, 오늘은 산딸기 역시 새콤달콤하더라고요. 이 작고 예쁘고 달콤한 열매를 입에 넣고 있으니 계절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 같아 작가님께도 말하고 싶어졌어요. 작가님, 오디와 산딸기는 지금이에요! 이 계절이 지나기 전에 꼭 이 작고 예쁘고 달콤한 열매를 누리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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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다의 안부를 적고 나니 수풀집의 안부도 궁금해집니다. 제초 콜라보 활동의 일환으로 제가 솎았던 당근 친구들은 잘 자라고 있나요? 귀여운 촉이 올라왔던 생강은요? 그리고다 텃밭 속엔 굵직한 돌이 많아 당근과 생강 같은 뿌리 작물이 자라기 어려워 첫 시도만에 포기 했는데 수풀집에서 보송하게 자라고 있는 초록초록한 당근싹을 보고 얼마나 예쁘고 기특하던지요. 보드라운 싹을 보며 넋 놓고 있을 때, 작가님은 당근싹이 너무 촘촘히 났다며 가차 없이 솎아주라고 하셨죠. 이제와 말하지만 작가님 그 때 진짜 재벌 같았어요. 당근 재벌.. '세상에 당근싹을 이렇게 낭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부자다!' 솎아 낸 당근싹이 너무 많아서 버린 것은 지금도 아쉽습니다. (샐러드에 더 많이 넣어 먹었어야 했어요! 그냥 제가 다 싸왔어야 했어요!) 그 뿐만 일까요, 샐러드에 넣어 먹을 상추를 수확할 때 잎을 한 장씩 떼는 게 아니라 가위로 통째로 잘라 버리는 모습에 충격먹은 저에게 작가님은 말하셨죠. "이래도 또 나요" 그 때 작가님의 미소에선 뭐랄까, 진정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지더라고요. '혹시 이 상추가 죽는다고 해도 저기 저렇게 상추가 많은데 무슨 걱정이야'가 그 미소 안에 담겨있었어요. 그날 저녁에 먹은 생양파의 맛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 손으로 텃밭에서 직접 캔 양파의 맛..! 매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달달함에 지난 가을 덕유산 안 가고 300포기의 양파를 심어준 작가님의 친구분들께 마음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낼만큼 맛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홀린 것처럼 생양파를 빠에야에 싸 먹었잖아요, 빠에야를 생양파를 싸 먹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맛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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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봐도 아쉬운 당근싹...!)
지난 편지에서 계절 얼리어답터로서의 고충을 토로하셨지만, 작가님의 서두르는 마음 덕분에 그리고다에선 5월 말이 되어서야 할 자급자족 텃밭 식탁을 일찍 만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다의 상추는 이제야 한 장씩 떼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자랐는데, 작가님께서 4월부터 상추씨와 당근씨를 바지런히 심어둔 덕에 좋아하는 샐러드를 양껏 먹었으니까요. 수풀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작가님이 작은 소리로 "오늘이 모내기를 준비하는 소만인데.." 라며 절기를 말하던 모습이 기억나요. 그리고 그렇게 절기를 고대하는 사람만이 이른 봄에도 이토록 풍성한 식탁을 얻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지금쯤 벌써 망종과 하지를 떠올리며 다음 작물을 고민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저의 미리력이 꽤나 상승한 것 같습니다) 망종이 되면 우리가 하꼬와 산책하며 보았던 청보리밭의 보리도 모두 익겠지요? 그러고 보면 모든 작물은 고유의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리의 때, 양파의 때, 토마토의 때. 그 때를 무시한 채 5월 초로 작물의 때를 퉁쳐 버려 기대도 못한 제철 작물들을 수풀집에서 만나 더 반갑고, 귀하고, 좋았어요. 다 계절 얼리어답터 덕분입니다. 참고로 저는 절기 중엔 하지를 제일 좋아해요. 조급함은 싫어하지만, 하지를 떠올릴 때마다 따라오는 조급함은 이 날씨를 더 누리게 하거든요. 1년 중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가장 긴 하지를 기점으로 하루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오늘처럼 맑은 볕과 시원한 바람을 태양의 기운이 채워지고 있는 하지 전에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요, 하지가 지나면 해의 기운이 땅에 가득 차 더워지겠지만, 그럼에도 일조량은 하루씩 착실하게 줄어든다는 사실에 또 조급해져요. 그건 계절이 겨울을 향해 방향을 틀었고, 더운 볕도 얼마 남지 않았단 뜻이니까요. 혹 작가님이 일에 파묻혀 산책이 뒷전이 되었을 땐 하지의 조급함을 떠올려보세요. 그럼 지금의 설레는 바람과 볕도, 다가올 뜨거운 볕도 조급한 마음으로 누리게 될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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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에야에 양파를 싸 먹으며 새벽 두시까지 이야기 하던 날, 회사원 시절 주중엔 회사에 다니기도 벅찼을 텐데 주말마다 쉬지도 못한 채 시골에 내려와 이렇게 작물을 가꾸고 집을 살피는 게 힘들진 않았냐고 여쭈니 작가님께서 그러셨죠. 이렇게 안하면 회사를 그만둘 것 같았다고.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을 것 같더라고요. 이토록 게으른 저 역시 땅이 주는 치유가 있음을 느끼니까요. 따사로운 볕을 등지고, 호미로 흙을 파고, 잡초를 골라내고, 보드라운 흙으로 작물의 이불을 덮어주는 일련의 일이 주는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휴식의 형태 중에 이런 밭일이 있어서, 또 그 일이 주는 치유에 공감하는 이가 있어 기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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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집에 다녀온 후, 저의 일상에 몇가지 귀여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선 강력 추천하신 상추씨 5종 세트를 샀어요. 모종으로 사면 비싸다고 종묘상에 파는 상추씨 세트를 추천하셨잖아요. 작물 재력은 씨앗을 사는 게 아니라 절기에 맞게 씨를 심는 일에서 온다는 걸 알면서도 늦게 나마 따라해봤어요. 사는 김에 수풀집 마당에 핀 꽃들에 자극 받아 먹는 작물 이외에 심어 본 적도 없던 제가 수레국화와 라벤더 씨앗도 사서 심었고요. 어제는 알려주신 빠에야 레시피를 더듬더듬하면서 맛있는 한끼도 만들었습니다. (아주 성공적이었어요!) 오늘은 할미새도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이라면 용모를 단단히 기억해두었다가 새도감을 펼쳐 알아내셨을 텐데 저는 새도감이 없어 열심히 검색했어요. 긴 꼬리를 아래 위로 흔들며 총총 걸어 다니는 작은 새를 떠올리며 검색하니 할미새가 뜨더라고요! 작가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지나가는 할미새를 보며 신나게 호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게 수풀집에 다녀오고 난 후의 변화들이에요. 사람을 만나는 건 새로운 우주와 만난다는 것과 비슷하단 생각을 자주 하는데요, 이렇게 1년 간 편지를 주고 받고, 수풀집까지 다녀오면서 근사한 우주를 만나게 된 것 같아 기뻐요. 물론 이번 만남으로 제가 예상보다 싱겁고 별 거 아닌 우주였음이 탄로난 게 아쉽긴 하지만요. 바깥으로 보이는 면이 많은 직업이라서 그럴까요? 저는 누굴 만나도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실망했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솔직히 이번에도 그랬어요. 그런데 한가지 다행인 것은 그 만남으로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이 편지를 부치고도 우리에겐 아직 주고 받을 편지가 한 통 씩 남았잖아요.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해보니 저는 7년 째 혼자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흔치 않더라고요. 보통은 못난 모습을 보였더라도 다음이 없어 그대로 끝이거든요. 그렇게 보면 우리도 동료 아닐까요? 좋은 꼴 나쁜 꼴 다 보고도 내일 또 봐야하는 사람들. 작가님이 혹 저에게 실망하셨더라도 제게 부쳐야 할 다음 편지가 있고 그걸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또 이 서간문이 책으로 나오기 위해 마주해야 할 수 많은 미팅이 남았단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물론 그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원래도 싱거운 인간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진 않겠지만요. 그래도 이 꼴 저 꼴 보다 보면 어느새 정이 드는 동료애처럼 저의 싱거운 모습도 여러 꼴 중에 하나이길 바라며 편지를 부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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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의 마지막 날
동료 귀찮 드림.
추신. 그래도 꼭 만회하고 싶은 게 한가지 있으니, 샐러드입니다. 수풀집에서 돌아오는 날, 아침에 맛있는 샐러드를 만들고 싶은 마음과 무언가 조금 어려운 마음이 겹쳐 샐러드에 소금을 왕창 넣고 말았어요. 그럼 그냥 짜다고 말하고 먹었으면 좋았을텐데 짜다고 말도 못하고 우걱 우걱 먹었습니다. 심지어 작가님도 말 없이 드시길래 더욱 더 마음이 찝찝했습니다. 스스로 샐천(샐러드 천재)이라고 말할만큼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날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어요.. 이렇게 편지에 적음으로써 어느 정도 만회가 되겠지만, 이렇게 말만 번지르르 한 것으로는 영 성에 차질 않아서요. 다음에 그리고다에 놀러오시면, 또는 다시 수풀집에 놀러가게 된다면 제가 꼭 맛난 샐러드를 대접해 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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