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에서 충남 금산으로 보냅니다 (vol.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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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닦고도 돌아서면 노래지는 5월 2일, 송화가루가 섞인 봄 바람을 맡으며 툇마루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날은 제법 따뜻해졌지만, 그리고다는 북향의 집이라 바깥보다 실내가 춥거든요. 보일러를 틀자니 볕이 아까워 나와있습니다. 방금 전에도 걸레로 툇마루를 닦아내는 바람에 손은 텁텁하지만요. 오전엔 시장에서 모종도 3만원어치 사왔습니다. 점촌장은 3일, 8일에 서지만, 장날이면 두 세판씩 사가는 손 큰 어르신 사이에서 한 개씩 여러 종류로 사는 게 눈치가 보여 일부러 장이 서지 않는 한가한 날을 골라 갔어요. 이맘 때 점촌 시내엔 장날이 아니어도 모종 좌판을 까는 가게가 몇군데 있거든요. 취급하는 작물도 조금씩 달라서 한 군데서 사지 않고 여러군데서 조금씩 샀습니다. 아스파라거스 6개, 적상추, 청상추 8개씩, 청양고추 5개, 케일 4개, 노각 3개, 백다다기 오이, 가지, 딸기, 빨간 대추 방울 토마토, 노란 대추 방울 토마토 두개씩, 적양배추, 빨간 파프리카, 노란 파프리카, 피망 하나씩. 작은 텃밭에 이렇게 욕심 내면 발디딜 틈도 없어진단 걸 알지만, 적당히 사야지 해놓고도 막상 모종 사러가면 적당히가 안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잔뜩 사오고 나니 두어달 후 시작될 자급자족의 생활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작가님의 텃밭엔 어떤 작물이 자라고 있나요? 이 글을 쓰면서 수풀집 인스타 계정에 들어가 보니 작가님은 무려 3월 11일에 밭을 일구고 4월 7일엔 당근, 상추, 치커리, 아스파라거스씨를 심으셨더라고요. 역시 김 알토란 미리작가님.. 작가님의 부지런함에 자극 받고 저 역시 진즉에 텃밭을 관리하려고 했으나, 매년 4월이 다 지나고 나서야 부랴부랴 밭을 일구던 버릇이 어딜가지 않더라고요. (부끄럽지만 저는 늘 5월 초에 모종을 심기 시작했어요) 특히 올해는 늘 피던 민들레와 제비꽃에 못보던(이라 쓰고 편지 덕분에 이제야 보인다고 읽는) 광대나물 꽃까지 피어서 밭을 일굴 의지가 매번 꺾였어요. (어르신들 눈엔 풀밭이겠지만) 형형색색의 꽃밭을 갈아엎기엔 아침마다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꽃을 보는 기쁨이 너무나 컸습니다. 일이 바쁠 때도 잠시라도 짬을 내어 어여삐 핀 꽃들과 연두빛 산을 바라보면 누적된 피로가 치유되는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올해도 텃밭 관리는 5월로 미뤄졌습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마침 4월 15일부터 보름간 서울 출장까지 있어‘돌아와서 하면 되겠지’라고 합리화하기도 좋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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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눈요기 하던 꽃들이에요. 진짜 꽃밭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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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보름 간 서울의 생활인구가 되었습니다. 서울로 떠나기 직전, 평온한 꽃밭을 보며 꽃을 피워낼 만큼 단단히 내렸을 뿌리를 생각하니 조금 심란했어요. 하지만 눈에서 안보이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 처럼 서울에서 며칠 지내니 텃밭에 대한 마음의 부채도 금세 사라지더라고요. 오히려 눈에서 가까워진 서울 생활에 푹 빠지게 되었죠. 지난 번 편지엔 제 아무리 좋은 카페나 맛집을 다녀와도 가장 좋은 건 이 시골집이라고 적었지만, 이번 서울 생활은 편지를 적을 때 상상했던 것만큼 암울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서울의 새로운 면모와 잊고 있던 장점을 발견하게 되었죠. 작가님과의 급만남처럼 좋아하는 사람들을 갑자기 만날 수 있는 곳이 서울이더라고요. 우리가 만났던 그날도 아침 8시에 카톡하다가 갑자기 만나게 되었잖아요. 얼른 씻고 호다닥 나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만나는 기쁨! 얼마나 가볍고 좋던지요. 덕분에 알게된 남산 둘레길도 너무 좋았고, 당이 떨어져 졸릴 때 즈음 먹은 핫케이크와 아이스 커피도 아주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시골에선 이런 식의 갑자기가 없잖아요. 갑자기 불러 만날 친구도 없지만, 있다고 해도 갑작스럽게 만날 공간 역시 없으니까요. 만남의 시간을 위탁할 카페나 식당이 없는 시골쥐에게 만남이란 약속한 날짜에 맞추어 집을 청소하고 식재료를 준비해야하는 일이었는데 그런 번거로움 없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편리한 세계인지요! 서울은 그런 매력이 있더라고요. 덕분에 출장을 빙자해 그간 보고 싶었던 사람은 물론 새로운 사람들과도 마음 놓고 만날 수 있었어요.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 피곤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영감과 자극을 받고, 사유하고, 깨닫기도 해서 앞으로는 이렇게 종종 서울의 생활인구가 되어 봐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보름간의 서울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목격한 문경의 첫 장면은 논에 물을 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모내기라니, 서울에 있었던 보름간 시골은 하루가 다르게 계절이 변해가고 있었음을 직감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떠날 때만해도 온갖 여린 색이 찬란했던 산은 무성한 초록이 되기 직전까지 익어버렸고, 꽃밭이었던 텃밭은 잡초밭(feat. 민들레 홀씨)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무릎까지 오는 잡초들의 위상에 잔뜩 겁을 먹어버린 저는 서울의 친구에게 SOS를 쳤어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해진 밭에 마음은 조급한데 자영업을 하는 가족들은 주말이 되어야 시간이 나고, 저 혼자 들어갈 엄두는 조금도 나질 않았거든요. 그리고다 최초로 텃밭 관리를 위한 외부 인사를 영입했습니다. 그리고다 최다 방문자, 친구 며니를 초대한 것이죠. 며니가 가장 좋아하는 작물인 청양고추 지분을 내어주고 함께 잡초를 뽑기로 했어요. 그렇게 저와 며니는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해서 잡초 노동을 했습니다. 아침 9시, 양말 속에 몸빼 바지를 넣어 입고, 반팔에 긴 상의를 하나씩 덧 대어 입은 후 모기 기피제를 온몸에 뿌렸습니다. 옷에는 물론, 정수리와 뒷 목처럼 빠트리기 쉬운 부분도 꼼꼼히 뿌려야 모기의 공격을 피할 수 있거든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렇게 꼼꼼히 뿌리고도 손목을 잊어 결국 손목에 두 방 물렸습니다) 목장갑을 끼고 뽑은 잡초를 담을 큰 대야, 호미, 쇠스랑을 꺼내왔어요. 작가님이 주신 제초호미도요! 곧바로 잡초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일교차 덕분에 생긴 습기로 흙이 아직 고슬고슬할 때 얼른 뽑아야 했거든요. 한낮의 열기로 말라버린 흙에는 호미도 잘 안들어갈 테니까요. 그렇게 꽃들은 사라지고 이파리만 남은 풀들을 쥐고 뽑고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순위를 매기자면 가장 뽑기 힘든 1위는 민들레, 가장 뽑기 쉬운 1위는 광대나물, 가장 귀찮은 1위는 강아지풀이었어요. 민들레는 뿌리가 얼마나 깊고 튼튼하던지, 흙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잘 안떨어지기도 했지만 뿌리 자체가 아주 깊어 아무리 호미질로 파내도 중간에 뜯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뿌리와 씨름할수록 지난 날 민들레꽃을 보며 앞날은 모른 채 그저 좋아서 사진이나 찍어대던 제 자신의 모습이 스쳐가더라고요. 그때 뽑았어야 했는데 말이죠. 광대나물은 그냥 쥐고 뜯으면 뿌리까지 딸려오는 의외로 착한 잡초였어요. 뽑으면서 '어쩜 나물 심성도 작가님처럼 순하지?' 생각했습니다. 광대나물도 그렇고, 사람을 좋아하는 소망이도 그렇고, 작가님 주변엔 온통 순한 존재들이구나 싶었어요. (반려동물은 주인을 닮는다던데 저희집 마루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강아지풀은 이파리만 배꼼 나온 상태라 엄지와 검지로 잡아 올리면 쑥- 하고 뿌리까지 나왔지만 너무 자잘자잘하게 많이 나서 쪼그려서 하나 하나씩 뽑으려니 진도는 안나가고, 허리는 아프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었어요. 선물 주신 제초 호미로 슥슥 긁어냈더니 우수수 뽑혔지만 하나 하나 골라내기가 번거로워 결국 어느 정도 포기하고 그냥 밭을 갈아버리는 (작가님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과감한 결단을 내린 끝에 정글같은 풀밭을 보드라운 흙밭으로 일굴 수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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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중간 손바닥 만한 갈색 개구리를 보고 소리 지르고, 아무렇게나 쥐었다가 뒤늦게 통통한 송충이인 걸 발견하고 몸서리 치긴 했지만 토종 지네나 뱀을 보지 않았으니 아주 성공적인 잡초 제거였습니다. (토종지네는 한 번, 뱀은 두 번 봤어요.. 그것도 까치살무사..) 무엇보다 서울에서 영입해 온 외부 인사 며니가 아주 일을 제대로 해주었습니다. 혼자 할 엄두가 안나 친구를 부르긴 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어요. 아무리 도와주러 온다고 해도 손님은 손님이니 며니가 지렁이나 개구리를 보고 못하겠다고 할 경우, 그만 두고 카페나 맛집으로 전향할 생각까지 해두었는데 예상과는 정반대로 며니가 저보다 훨씬 잡초 뽑기에 진심이었어요. 제가 지나간 자리의 텃밭엔 듬성 듬성 강아지풀이 남은 반면 며니가 지나간 자리는 그 어떤 풀도 없이 흙만 남아 있었거든요. 처음 해보는 호미질로 능숙하게 잡초를 제거 한 뒤엔 부탁하지도 않은 일들을 하기 시작했어요. 긴 빗자루로 마당의 거미줄을 정리하고, 노란 가루가 소복히 가라 앉은 툇마루와 창틀을 닦았죠. 저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생시키려고 부른 게 아닌데, 미안해서 고맙다는 말도 안 나와 그만하라고 말하는 저를 보며 며니는 “이거 힘들면 진작 때려쳤지~ 근데 지금 너무 좋은데? 시골 체질인가봐”라며 물 호스로 수도가에 구석에 쌓인 흙먼지들을 배수구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이거로 마당까지 싹 청소 하면 개운할 것 같은데 네가 절대로 못하게 하겠지?”
“응 하지마 본인 집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그만 해~”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다인데 이렇게 깨끗해지면 나도 좋잖아”
마당 청소를 가까스로 말리고, 집으로 들어와 새참으로 김밥에 찹쌀 도나스를 먹고 낮잠에 빠진 며니를 보며 생각했어요. '나는 참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어려운 인간이구나, 그냥 고맙다 하면 되는데' 돌이켜보니 고마운 일을 만드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신세지는 게 싫고. 덕보는 것도 싫고.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로 재듯 정확히 주고 받는 관계보다 더러는 신세도 지고, 충분히 고마워하는 게 더 가까운 사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이후 며니에게 쭈뼛쭈뼛 여러 번 고맙다는 말을 했어요. 어색해서 눈을 쳐다보고 전하진 못했지만, 앞으론 오늘의 고마움을 기억하며 마음을 담아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에도 익숙해져 보려고요. 감사하다, 고맙다, 참 일상적으로 쓰는 말인데 오늘에서야 고마움에 대해서, 알아야 할 시기가 한참 지나 제대로 알게된 것 같아요.
실은 작가님의 초대장을 받아 들고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너무 감사한데, 너무 피곤한 일이 따르니까요. 작가님께서는 이불 한 채 더 내어주는 게 뭐가 대수냐고 하시겠지만, 시골에서 손님 맞이를 여러번 해본 저로서는 사람 다녀가는 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기에 선뜻 가겠단 말이 나오질 않았거든요. 오기 전부터 청소하고, 삼시세끼 차려 내고, 커피 내리고, 치우고, 이부자리 준비 하고, 손님 가고 나면 이불 세탁하고, 또 청소하고.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한 일들을 너무 구구절절 써서 큰 일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게 사소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이렇게 선뜻 초대해 준 작가님께 전하고 싶어요.
미리 작가님, 초대장을 보내주셔서 정말 기쁘고 고마워요. 설레는 마음으로 금산의 생활 인구가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곧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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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일
민들레의 꽃말을 담아, 귀찮 드림.
추신. 3월에 출간된 작가님의 두번째 책 <아무튼, 집>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이번 편지 속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성인데도 음성지원이 되는 것 같았어요. 거친 말에서 애정이 와르르 쏟아지는 느낌! 작가님의 섬세한 글 속에 할머니께서 여전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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