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어느덧 봄입니다. 지난 편지만 해도 우리 둘 다 함박눈에 고립되었는데 어느새 집 앞 개울 위로 매화나무 꽃이 피었어요. 놀랍죠? 꽃이 피는 계절이라니. 오늘은 마루와 산책을 하다가 광대나물 비슷한 꽃도 보았어요. 알고 보니 현호색이라는 꽃이었고, 꽃만 비슷하고 이파리는 다르게 생겼었지만 보라빛 꽃을 보니 작가님과 광대나물 이야기를 나누던 게 벌써 작년이구나 싶더라고요. 신기하죠. 쪼글쪼글한 완두콩 이야기로 시작했던 편지인데 다시 완두콩을 심기 좋은 계절이 온 거 잖아요. 새삼스럽지만 아주 긴 계절을 지나온 것 같아 묻고 싶어졌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오늘 저희 마을에는 오늘 아주 귀한 손님이 왔다가셨어요. 고작 일년에 한번 뵙는 것뿐인데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죄송하고, 송구하고, 감사한 분. 아이스크림 차도 아닌데, 후진할 때마다 클래식한 오르골 음악을 들려주시는 분. 눈치채셨을까요? 바로 분뇨수거차 선생님이요. 언젠가 작가님께서 수풀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하수도관이 생겼다고 말하셨던 것 같은데, 그리고다는 시내 버스로도 종점까지 가야 닿는 아주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라 아직 상하수도시설은 물론 오수관도 안 들어와 있어요. 마시고 씻을 때 쓰는 상수는 높은 산에 마을 공용 물탱크를 놓고 쓰고, 오수는 마당의 정화조를 통해 걸러진 뒤 바깥의 개천으로 나가죠. 창피한 이야기인데, 지금 집을 고치기 시작할 때 동파로 배관이 터져서 모든 배관을 다 새로 하긴 했지만 유일하게 헌 걸 그대로 쓴 게 정화조 통이에요. 헌 집 고치는 데 얼마나 돈이 많이 들던지,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큰 공사금액 덕분에 만원 한 장이 아쉬운 상황이었거든요. '어차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오래되고 용량 적은 기존의 정화조 통을 그대로 썼어요. (그래서 2018년 8월 4일 다이어리에 쓴 일기엔 '통장에 10원 한 장도 없다..'라고 적혀 있어요 하하) 덕분에 매년 이맘 때 즈음 마음이 닳습니다. 뵐 때마다 창피하고 부끄럽지만, 분뇨수거차 선생님이 오시지 않으면 먹고 배출하는 아주 기본적인 생활도 유지할 수 없거든요. 오늘 선생님께서 정화조 뚜껑을 드러내고 나니 보이는, 찰랑찰랑하게 찬 오수를 보며 또 후회했어요. 얼마 한다고. 그냥 그때 큰 걸로 하나 들일 걸. 하고요.
"아이고 늦게 왔으면 큰일 날 뻔 했네"
열자마자 올라오는 역한 냄새에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말씀하셨어요. 저에게 수도 호스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뒤 큼지막한 양동이에 물을 가득 받으시고, 뚱뚱한 초록색 차에서 긴 흡입기를 끌고 오신 선생님은 흡입기를 정화조에 넣어 빨아 들이기 시작하셨죠. 작업이 진행될수록 진해지는 가스 냄새에 머리가 아파 가까이 있기도 힘든데 선생님은 큰 눈을 부릅 뜨고 정화조 안을 적극적으로 훑으셨어요. 과감한 몸동작에 혹여나 선생님의 손이나 옷, 주변으로 오물이 튈까 걱정했지만 그는 일말의 튐(?)도 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정화조를 비워냈어요. 그리곤 미리 받아둔 물로 흡입기와 정화조 주변을 가볍게 헹궈낸 뒤 호스로 다시 한번 깨끗하게 씻은 다음 뚜껑을 닫으셨죠. "휴" 지독한 노동이 끝났음에, 다시 1년을 무탈히 생활할 수 있단 사실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선생님의 고된 노동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얼마를 부르시든 부르는 대로 드려야 할 것 같았는데, 선생님은 이번에도 작년과 똑같이 말하셨어요.
"4만원 입금해주세요"
물가는 매년 무섭게 오르는데 분뇨수거차 선생님의 노동 가격은 그대로였어요. 노동의 가치로 봐선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가 아니더라도 진작 올렸어야 할 것 같은데 시골의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업이다보니 가격 인상이 쉽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선생님께 시원한 음료를 쥐어드리고, 감사 인사로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저도 모르게 동생에게 말했어요.
"선생님이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이기적인 바람이었어요.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로 분뇨수거차 선생님의 건강을 바랐으니까요. 매해 봄마다 오르골 소리를 내며 찾아오는 그의 노동이 없었다면 아주 기본적인 삶도 영위하지 못했을 제 시선에서 본 그의 일은 노동이라기 보다 큰 봉사였거든요. 그가 이런 봉사를 얼마나 이어나가 줄지, 일을 그만 두고 나면 대체 어느 누가 그를 대신해줄지를 떠올리면 그저 건강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어요. 이런 바람을 분뇨수거차 선생님께만 느끼는 건 아니에요. 깊은 시골 마을을 오가며 어르신들의 발이 되어주는 버스 기사님, 새벽 배송이나 로켓 배송이 아니어도, 그저 가져다 주심에 감사한 택배 기사님, 미처 치우지 못한 눈 길에 연탄재를 뿌려가며 멀리 까지 등유를 배달해주시는 주유소 사장님, 흙탕물이 나오거나 물이 안 나올 때마다 쪼르르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물탱크 관리 선생님이 없었다면 이 깊은 산골마을에서 이토록 안락하게 살 순 없었을 거예요. 제 시골 생활의 빛과 소금같이 귀한 분들. 이 분들 없는 시골생활은 상상하기도 싫지만 이대로라면 결국 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보다 더 많은 게 소멸한 순간을요.
수풀집이 있는 마을도 그렇겠지만 예전엔 이 마을에 학교도 있었고, 슈퍼는 물론, 방앗간과 수선집도 있었다고 해요. 심지어 제가 살고 있는 그리고다도 오래 전 슈퍼 자리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땐 이런 작은 마을에서도 무언갈 사고 팔고 꿔주고 빌리는 게 가능했던 시절이었대요. 골목마다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리고 집집마다 아이와 부모, 어르신이 같이 모여 살았던 복작복작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어느덧 스무 채 남짓 남은 이 마을에 사람들이 오고 가며 누릴 수 있는 공유 공간은 마을회관이 전부가 되었어요. 지금 여기서 어르신들이 두루마리 휴지나 파스 하나라도 사기 위해서는 새벽 같이 시내 버스 타고 나가서, 오후 버스를 타고 돌아 와야 해요. 점촌 시내에서 이곳까지 들어오는 버스는 하루에 일곱 대밖에 없거든요. 그런 어르신들께 힘들지 않냐고 여쭤보면 하나같이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고 말씀하세요. 이대로라면 여섯 대로 줄어들 걸 걱정해야 할 테니까요.
여기로 이사를 오던 해만 해도 마을은 제법 북적였어요. 특히 개울가 옆 큰 나무 아래 있던 평상 위에선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렸죠. 그곳은 할머니들의 핫플이었어요. 언제 가도 어르신들이 앉아 계셨죠. 요즘 같이 볕 좋은 봄날이면 쪼르르 모여 앉아 기특하게 싹을 낸 작물과 꽃 이야기를 하셨고 초여름이면 부르스타에 저로선 구별할 수 없는 산나물로 노릇한 산채전을 구워 직접 만든 맛깔난 간장에 찍어 드셨어요. 소주 한 잔도 함께요. 무지하게 더운 여름 날이면 통 큰 수박을 석석 잘라 나눠 드시고 밤에는 베개와 부채를 가져와 잠드시기도 했죠. 가을이면 작은 솥에 펄펄 끓인 콩을 갈아 만든 손두부를 건네 주시고, 겨울이면 빨간 고무 대야를 몇 개나 갖다 놓고 김장을 하셨죠. 덕분에 마을 회관의 김치냉장고엔 언제나 김치가 든든히 채워져 있었어요. 누구네 집 아들이 승진하는 좋은 소식이 있으면 다같이 송어회를 드시러 가시거나, 날이 좋으면 버스를 대절해서 바닷가에 놀러 가시기도 했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평상에 앉아 계신 할머니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어요. 몇 달 전까지 여기 와서 부침개 하나 입에 물고 가라고 하시던 할머니께서 병원으로 가시고 난 후로, 얼마 안돼 마을 회관에서 부고를 전하는 마을 방송이 흐르고 나면 평상은 더 조용해졌어요. 그렇게 몇 분 돌아가시고 나자 평상은 완전히 활기를 잃고 말았어요. 평상뿐만 아니라 어르신들이 살던 집도요. 캄캄한 밤에도 비스듬히 누운 할머니의 그림자 너머 티비불이 보이던 집은 낮에도 밤에도 캄캄하게 방치되었죠. 그렇게 평상엔 채워 지지 않을 빈자리가 생기고, 버스 탈 사람이 한 사람 줄어요. 분뇨수거차나 등유배달차가 갈 집도 줄고요. 그러니 버스 배차도 줄어들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 소멸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곳에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