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편지를 보냅니다. 작가님,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엔 작가님과 제가 나란히 함께 복을 짓고 또 받는 순간도 있었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예를 들면 (작가님과 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 출간한) 이 책이 유례없는 대박이 난다던지…… 글 쓰면서 너무 속물적인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전 그래요. 저희가 쓴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어요. 책을 만드는 일에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수고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렇습니다. 책이 많이 팔려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두가 자신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작가님과 저도 포함입니다.
잠시 대박이 터진 이후의 작가님과 저, 편집자님을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상상해 봤습니다. 작가님과 편집자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주목받는 삶만은 꼭 피하고 싶기 때문에 대박 말고 중박정도만 났으면 좋겠다, 고 슬쩍 생각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이 책은 공저하는 책이라 인세가 반이니, 작가님과 저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려면 중대박(중박과 대박의 중간) 정도는 나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어요. 심각하게 고민하다 겨우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일단 이 편지를 보내야 대박이든 중박이든 소박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지요.
2024년의 첫날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떡보다 만두가 더 많이 들어간 떡만둣국을 끓여 먹었어요. 요즘엔 다양한 채식만두를 쉽게 살 수 있어서 설날이 덜 부담스러워졌어요. 게다가 올해는 떡국을 먹어도 한 살 더 먹지 않는 최초의 1월 1일이었잖아요? 상쾌한 마음으로 새 노트를 꺼내어 새해 다짐을 적기도 했습니다. 새해 첫날이 월요일이기까지 하니 무언갈 시작하기에 딱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편지에 밝히기엔 부끄러운 여러 다짐들과 함께 ‘루틴 있는 사람 되기’를 적어 넣었습니다. 작년에 ‘패잔병의 고백’이라는 제목을 달아 보낸 편지에도 썼지만, 프리랜서가 된 후 시간에게 멱살 잡혀 끌려가고 있거든요.
그러던 차에 유튜브에서 이런 이야길 들었어요. 루틴이 있으면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갓생을 살게 된다는…… 루틴이라곤 아침에 일어나 모닝페이지를 쓰는 것 밖에 없는, 숏츠와 릴스가 주는 도파민에 절여져 있는, 결코 안프리한 프리랜서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저는 바로 새해의 루틴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출근을 하는 날이냐, 오늘처럼 집에서 글을 쓰는 날이냐에 따라 두 가지 루틴을 만들었어요. 오늘처럼 글 쓰는 날의 아침 루틴은 아래와 같습니다.
07:00 기상 + 화장실/양치 + 물 끓이기
07:10 소망이 사료 + 물 마시기
07:20 모닝페이지 쓰기
07:40 오늘 할 일 정리 (feat. 불렛저널)
07:50 소망타임 (소망이 털 빗기/화장실 정리/낚시놀이)
08:10 샤워 및 간단 꾸밈
08:30 업무 메일 확인/답장
08:50 뉴스/콘텐츠 읽기
09:00 독서
09:40 모닝커피 + 휴식
10:00 오전 작업 시작
…
이렇게 자정까지 쭉 이어지는 루틴은 새해 첫날 아침에 설계됐습니다. 다음 날부터 실행하기로 결심했어요. 첫 날인 1월 2일, 저는 갓생러로 환생한 듯했습니다. 몇 가지 수정해야 할 부분도 있었지만 하루 만에 생산성이 크게 향상된 것 같았거든요. 좀 더 수정된 루틴을 실행한 1월 3일엔, ‘루틴이 있는 삶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뿌듯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어요. 3일 차인 1월 4일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루틴과 함께라면 새해 다짐이 다짐에만 머무르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그리고 다음 날인 1월 5일은 어땠냐면요.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앓아누웠어요. 몸살이 났거든요.
독감이 유행이기도 했지만 저는 새로 시작한 루틴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어요. 사흘동안 짧게는 10분 단위로 달려오는 다음 루틴을 의식하느라 내내 종종거렸거든요. 차가 막혀 예상보다 이동시간이 길어지면 조바심이 났습니다. 새해 안부를 전하는 이들과 카톡을 하면서도 계속 시간을 확인했어요. ‘아, 다음 루틴 시작해야 할 시간인데…’ 하면서요. 실제로 친구에게 다음 루틴 시간이 다가와서 이만 전화를 끊자, 고 말했다가 루친자(루틴에 미친 자)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습니다.
네, 루친자로 불렸던 이는 3일 만에 병이 났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다가 좀 살만 하다 싶으면 핸드폰을 하며 시간을 죽였어요.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일분일초를 의식하며 바삐 지냈는데 말이죠. 저는 침대에 누워서 속으로 외쳤습니다. “루틴? 이게 내 루틴이다!*”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하유미 배우가 외치는 대사 “교양? 이게 내 교양이다!” 느낌으로 읽어주세요, 작가님.
어쩜 그렇게 딱 작심삼일인지 어이없고 웃기지만, 그날 몸살이 나지 않았더라도 얼마 못 가 탈이 났을 거예요. 루틴이란 매일 반복할 수 있는 정돈된 습관을 말하는 것일 텐데, 저는 시간 감옥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를 닦달했으니 말이에요. 그날 오후, 몸과 마음을 추스른 뒤 다시 노트를 펴고 앉았습니다. 빽빽한 시간 계획표에 가까운 루틴에 과감히 X 표시를 했어요. 그리고 새 페이지에 매일 꼭 하고 싶은 일 몇 가지만 썼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 옆에 그 일을 하기 위해 꼭 지켜내고 싶은 시간을 함께 적어 넣었어요. 처음과 달리 여백의 시간이 더 많은 루틴이었습니다.
그러는 김에 새해 다짐도 고쳐 썼습니다. 영어 공부와 소설 쓰기에 과감히 취소선을 그었어요. 이미 계약한 책들을 예정대로 출간하고(중대박 이상 나야 하는 이 책 포함이죠), 협업 파트너들과 약속한 일을 완성도 있게 해내려면, 배움이나 창작을 추가하기보다는 휴식과 놀이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저는 그 자리에 ‘탐조(探鳥)하기’를 적었습니다.
몇 년 전 가까운 동물 친구가 하나 둘 생기며 동물을 사랑하게 되었는데요. 그전까지는 동물을 좋아하기보다 무서워하는 쪽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제가 길을 걸으며 새를 관찰하는 탐조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시골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예요. 아침마다 수풀집 주변의 새들이 어찌나 크게 우는지 알람이 필요 없을 정도거든요. 작가님이 계신 그리고다도 비슷하겠지요?
계절마다 다른 새소리가 늦잠을 깨우는 일이 익숙해지고, 깊은 밤 들려오는 산새 울음소리가 반가워지다, 처마 밑 둥지에서 쉴 새 없이 입을 벌리는 새끼 새들이 애틋해졌을 때- 저는 궁금해졌어요.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언제 어디에서 와서 또 어디로 날아가는 건지 말이에요. 새들은 땅 위에 발을 딛기도 하지만 어느새 땅을 박차고 하늘로 훌쩍 날아가잖아요. 그래서 유심히 볼 수 없고 더 알고 싶어지는 존재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북쪽으로 돌아가는 겨울철새, 봄에 우리나라에서 번식하고 가을에 남쪽으로 이동하는 여름철새, 봄과 가을에 우리나라를 거쳐 가는 나그네새, 일정 지역에서 일 년 내내 볼 수 있는 텃새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도 신기합니다. 자연, 날씨, 계절 덕후인 제게 ‘탐조하며 자연에서 놀기’만큼 유혹적인 새해 다짐이 또 있을까요?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를 볼 때면 어떻게 길을 잃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떠나야 할지 아는지, 어떻게 안주하지 않고 훌쩍 떠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늘과 바다도 구분되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어떻게 지금 날아가고 있는 방향이 바르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도 묻고 싶었다. 낮과 밤의 길이, 지구의 자기장이나 태양의 위치, 별자리와 후각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는 것도 쉽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게 인간이기에 더욱 그랬다.
- 우숙영, <산책의 언어> 중에서 -
이 문장을 읽자마자 새 도감을 주문했습니다. 작년 10월에 드린 편지에 백로, 왜가리, 두루미, 황새를 구분할 수 없다고 썼었는데요. 올해는 새를 사랑하는 탐조인이 되어 그들의 정확한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요. 새도감을 뒤져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기대하세요. 다음번에 작가님을 만날 때는 이제 막 한글을 배워 모든 간판을 모조리 읽어버리는 어린이처럼 만나는 새들을 열심히 호명할 테니 말이에요.
지난번 송년회는 정말이지 즐겁고 아쉬웠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홍대에서 (편집자님 포함) 셋이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웠고,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아쉬웠어요.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한 것이 큰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부턴 꼭 낮부터 만나요. 두 번째 실수는 작가님의 삼동초 씨앗과 제 완두콩 씨앗을 물물교환 하기로 해 놓고 빈 손으로 간 것입니다. 일부러 물건을 두고 가서 또 만날 기회를 엿보는 썸녀처럼 의도한 것은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또 만나야겠네요! 마지막 실수는 제초 호미를 금산에서 사 가지 않은 거예요. 제가 쓰는 제초 호미는 금산 읍내 농약사에서 산 제품으로, 호미의 머리가 날쌘돌이처럼 생기고 그립감이 참 좋습니다. 당연히 온라인에서도 팔 줄 알고 빈 손으로 서울로 향했는데요. 동일한 제품이 없었어요. 꼭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최대한 비슷한 제품으로 구매하기는 했는데, 계속 마음에 걸려요. 읍내 농약사 사장님이 특허받은 귀한 호미라 천 원을 못 깎아주신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금산에 놀러 오시기로 하셨으니 그때 농약사 쇼핑 함께 가요. 이번엔 특허받은 호미로 사 드릴 테니 기존 호미는 동생분께 양도하세요.
작가님, 지난 편지에 써 주신 집업실 이야기에 얼마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몰라요. 인지할 일이 없었던 ‘배관의 기울기’로 인한 문제나 여러 번 겪어보지 못한 ‘예고 없는 단수’가 흔한 시골이니까요. 겪을 땐 힘겨웠는데 작가님과 편지로 주고받으니 재밌는 에피소드처럼 여겨집니다. 게다가 화장실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하고, 길게,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니…… 저 또한 작가님이라서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매달 놀라고 있습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숙박업을 하겠다”라고 하셨죠. 어쩜…… 저도 그랬어요. 수풀집을 지을 당시에 저는 회사원이었는데요. 회사를 다니다 정히 안 되겠으면 수풀집에 아주 내려와 농어촌 민박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농어촌 민박을 하려면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주거용 보다 큰) 용량의 정화조를 매립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허가에 적합한 큰 용량의 정화조를 시공하며 수풀민박을 선명히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 민박의 꿈은 접기로 했어요. 아주 가끔 다녀가는 지인들의 방문도 힘겨워하는 제가 싹싹하고 친절한 민박집주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대신 보다 성숙한 자연생활자이자 프리랜서로서, 새로이 적은 다짐들을 실천해 나가며 2024년을 보내려 해요. ‘다짐’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마음이나 뜻을 굳게 가다듬어 정함’이라고 하더군요. 단어 속에 이미 굳게라는 의미가 들어 있으니 굳은 다짐 말고 헐렁한 다짐을 하려 합니다. 괜히 또 앓아눕지 않으려면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추신. 작가님의 새해 다짐도 궁금합니다.
2024년 1월 10일
탐조 새내기 김미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