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한 마음으로 “북토크 하는 법”을 검색하다 동료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던 작가님의 심정…… 알 것 같습니다. 11월에 작가님께 편지를 보내던 제 마음과 닮았어요. 경솔하고 오만했던 것 같다니요, 보내주신 두 통의 편지 모두 위로와 응원으로 읽혔는걸요. 이제 막 출발한 사람에게 비슷한 시절을 먼저 지나간 이의 이야기가 꿀팁이 아니라면 뭐겠어요. 작가님이 그러셨죠. 전화로 무슨 이야길 나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통화를 마치고 어쩐지 기운이 났다고, 상대방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씩씩한 마음이 될 수 있었다고요. 지금 제 마음 또한 그렇습니다. 작가님이 보낸 위로와 응원이 제 마음에 잘 닿았으니 염려 마시라는 이야길 드리고 싶어요.
그나저나 답장을 두 통이나 받는 호사를 누렸으니 이번 편지엔 정말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려야 할 것 같아요. 이야기 주머니를 열심히 뒤적거리다 작년 이맘때의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2022년 12월 30일, 여느 날처럼 수풀집에 막 도착한 금요일 밤의 이야기입니다. 늦은 밤이라 여차하면 날짜가 12월 31일로 바뀔 때쯤이었죠. 연일 계속된 한파로 온 집 안이 싸늘하더군요. 출발 전에 핸드폰 앱으로 미리 보일러를 가동했는데도 말이에요. 서둘러 난로를 틀고 소망이 컨디션부터 살폈습니다. 아무리 차를 잘 타는 고양이라도 해도, 2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일이 쉽지는 않으니까요. 고생한 소망이를 무릎에 앉히고 엉덩이를 오래오래 토닥여줬어요. 소망이가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로 향할 때까지요. 소망이가 화장실에 들어가 모래를 힘차게 파고 덮는 소리를 들으며(소망이는 화장실을 아주 요란하게 쓰는 고양이랍니다) 소망이 밥그릇에 사료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브리타에 물을 채우려 싱크대 수전을 젖혔어요. 그런데… 물이…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솨아, 하고 쏟아져야 할 물이 말이죠.
어…? 어어어어어??? 당황한 저는 수전을 위아래로, 오른쪽왼쪽으로 열심히 움직여봤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세면대와 샤워기 수전을 열심히 덜컥여봤지만, 역시… 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수도가 얼었다는 확신이 들더군요. 생각도 못한 일이었어요. 그간 수풀집에서 여러 번의 한파를 겪었지만, 한 번도 없었던 일이거든요. 당장 소망이 물도 줘야 하고 목도 마른데 어쩌지 싶었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그날따라 서울집에서 싹 씻고 출발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늘 수풀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씻고 길을 나서고 싶었거든요. 불행 중 다행이었지요. 몇 시간 전의 저를 칭찬하고 섰는데 그 와중에 굉장한 요의가 느껴지더군요. 차에서 마신 커피가 열심히 이뇨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 화장실이고 해서 일단 생리현상부터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변기 물을 내렸죠.
작가님, 경솔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물이 한 방울도 안 나오고 언제 물이 다시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변기 물을 내리다니요!!! 자신이 지금 수도가 언 시골집에 있다는, 도시처럼 주변에 갈 만한 화장실이 없다는, 아침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레버를 누르고서야 ‘아, 물이 안 나오면 변기에 물이 안채워질 텐데?’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황하며 양변기 물탱크를 열어 남은 물양을 확인해 봤는데요, 이제 더는 변기를 쓰지 못할 것 같았어요. 저는 스스로를 향한 칭찬을 재빨리 거두었습니다. 좌절스러웠지만 이미 내린 변기 물을 뭐 어쩌겠어요.
혹시 사다 놓은 생수가 있을까 싶어 집안 곳곳을 뒤졌습니다. 특별히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생수를 사 마시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고 플라스틱이 많이 나와서 브리타를 사용한 지 꽤 되었거든요. 앗, 그런데 주방 벽장 안에 2리터짜리 생수가 한 병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생수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어요. 소망이 물그릇에 한 컵 부어주고, 일부는 끓여서 마당냥이들 물그릇에 부어주었습니다. 저도 한 컵 마시고요. 얼마 안 남은 물은 뚜껑을 꼭 잠가 싱크대 위에 소중히 올려두었습니다. 영화 ‘마션’에서 식량을 배분하는 마크 와트니의 마음을 (백만분의 일 정도는) 알 것 같았습니다.
목을 축이고 나서는 이런저런 검색을 하기 시작했어요. ‘언 수도 녹이는 방법’, ‘수도배관 녹이기’, ‘겨울철 물이 안 나올 때’ 같은 검색어를 입력했지요. 수도꼭지를 최대로 틀어놓고 수전과 배관을 드라이기로 녹이면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화장실 샤워기 앞에는 난로를 틀어놓고 주방 배관을 드라이기로 녹이기 시작했어요. 혹 드라이기가 과열되어 폭발하거나 전기까지 나가면 어쩌나 싶어, 드라이기로 녹이다가 잠깐 쉬었다가 또다시 녹이는 인터벌 녹이기 권법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바람을 쏘이자마자 수전에서 물이 몇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희망이 보였어요! 몇 시간이 흐르자 그 희망이 조금씩 흐릿해져 갔지만요.
결국 특별한 진척 없이 침실에 들어섰습니다. 실내온도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고 해서 보일러 희망온도를 25도로 맞춰놨더니, 보일러가 열심히 웅웅 돌아가고 있었어요(등유 값이 무서워서 희망온도 23도를 넘긴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때도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는 있었습니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지만, 집 안에 온기가 돌면 곧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수도를 최대로 열어놨는데 자다가 갑자기 물이 콸콸 쏟아지면 어쩌지?’, ‘내가 물소릴 못 듣고 계속 자면?’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채로 잠이 들었어요.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느라 온몸이 뻐근해서인지, 걱정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선잠을 잤습니다. 그때 침실과 가까운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몸을 접는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습니다. 드디어 물이 콸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실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분명 물 흐르는 소리가 났는데 말이에요. 그 소리는 새벽 4시에도, 5시에도 들렸습니다. 그때마다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역시 아무 일도 없었고요. 간절한 마음이 불러온 환청이었습니다.
그렇게 2022년의 마지막 해가 밝았습니다. 앞집할머니 댁 대문이 열린 것을 확인하고 얼른 달려갔어요. “할머니…… 저희 집 수도가 얼었어요. 밤새 녹였는데 안 녹아요……” 우는 소리를 한바탕 하고 세수와 양치를 한 후 할머니 밥상으로 아침식사도 해결했습니다. 양동이와 물병을 여러 개 챙겨가서 몇 번이나 물도 길어왔어요. 낑낑거리며 앞집과 제 집을 오가는 저를 목격하신 마을 어르신의 애정 어린 잔소리도 이어졌습니다. 집을 오래 비우는 사람이 수도를 살짝 틀어놓고 가야지, 이 추위에 꼭 잠그고 가면 어쩌냐고요. 여태 그런 적이 없었어서 생각도 못했다는 제게, 언 수도 녹이는 여러 방법을 전수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수도에다가 수건을 꽁꽁 싸매. 물을 팔팔 끓여갖구 거기에 뜨거운 물을 째끔씩 붓는 거여. 글케 몇 번만 하면 금방 녹을겨.”
“수도배관 지나가는 길을 따라 불을 때봐. 솥뚜껑 같은 거 있지? 그런 거 뒤집어다 놓구. 열기가 땅 속 배관 있는데 싸악 스며서 반나절이면 녹는다니까.”
“아녀. 압력밥솥으로 하는 게 젤이여. 압력밥솥 있잖여. 김 나오는 구멍에다가 얇은 호스를 끼워. 또 한 짝 끝은 밖에서 들어오는 수도배관에다가 연결하구. 그 담에 밥솥에다가 물을 넣고 팔팔 끓이면 밥솥의 증기가 호스로 들어감서 수도 곰방 녹아. 내가 우리 집도 그렇게 녹였다고. 있어 봐, 그 호스가 여 어디 있을 텐데…….”
어르신들께 배운 방법들을 오전 내내 시도했지만 수도는 녹을 기미가 없었어요. 저는 초췌한 몰골로 읍내로 향했습니다. 난리통에도 배는 고팠고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었거든요. 읍내를 오가며 모든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물이 콸콸 나오게 해 달라고요. 새해에는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선하게 살겠다는 다짐도 몇 번이나 했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나이롱 신도에게 신들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은 나오지 않았고 저녁밥도 앞집할머니 댁에서 해결했어요. 장 봐온 재료들을 씻고 다듬어 요리를 하는데도 물이 필요하니까요. 할머니는 집에 물이 안 나오는 것은 안타깝지만 이렇게 같이 아침도 먹고 저녁도 먹으니 참 좋다고 하셨어요. 저 역시 그랬어요. 대근해서 우쨔,라며 등을 쓸어주시는 할머니가 있어서 참 좋았어요.
할머니는 저를 배웅하며 저녁에 화장실에 가고 싶거나 물이 필요할지 모르니 대문을 조금 열어두고 주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어요. 방금 화장실도 다녀왔고 물도 길어다 놨으니 문 꼭 닫고 주무시라고. 요즘 세상이 험하다고.
그런데요, 작가님.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말이 맞나 봐요. 침대에 눕자마자 뱃속에 천둥이 치는 거예요…… 한 번 시작된 천둥은 배를 쥐어짜는 고통과 함께 점점 심해졌습니다. 저는 할머니 댁으로 달려가며 전화를 걸었습니다. 죄송하고 부끄러운 것은 생각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할머니, 저 배가 너무 아파요! 문 좀 열어주세요!”
한 차례 소동을 벌이고 집에 돌아오니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내일까지 할머니께 폐를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금산 언 수도 해빙’이라고 검색해서 몇 개의 업체를 찾고 번호를 메모해 두었습니다. 새해 첫날부터 출장을 오실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 일찍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침대에 누우니 가슴이 갑갑하고 우울해졌습니다. 제가 바란 한 해의 마지막과 시작이 이런 모습은 아니었거든요. 노래가사처럼 내일이 32일이라고, 33일이라고 우겨보고 싶었어요.
‘쿠룩쿠룩,쿠,쿠..쿠..’
그! 순! 간! 화장실에서 김이 빠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이번에도 환청인가 싶어서 망설이는데 그사이 소리가 ‘쏴아아아아아아아악’하는 소리로 바뀌었어요. 분명 물이 쏟아지는 소리였습니다! 새해를 30분 남겨두고 언 수도가 녹았어요. 저는 열광했어요. 침대에서 일어나 ‘기쁘다 수도 오셨네’를 외치며 미친 듯이 게다리 춤을 췄어요. 그 바람에 소망이가 놀라서 몸을 부풀리고 사이드스텝*을 하며 저어-멀리로 도망갔지만 저는 춤도, 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답니다.
(*고양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 무섭지만 강한 존재로 보이고 싶어서 몸을 부풀리고 옆으로 걸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