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씻으세요?”
초여름에 저희가 만났을 때 작가님이 하신 질문인데요. 기억하시나요? 그때 저는 그럼요, 하고 이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두 계절이나 지나 작가님의 질문을 다시 떠올린 것은, 조금 전 컴퓨터 모니터에 비친 스스로를 목격(?)했기 때문이에요. 핸드폰 액정이 꺼지거나 컴퓨터 화면이 전환되면서 잠시 검어지는 순간, 그 짧은 순간에 스스로의 모습을 강제로 목격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네… 오늘 제가 목격한 것은, 며칠이나 감지 않아 떡진 머리를 하고 조급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저였습니다. 요즘은 이런 제가 말끔한 저보다 더 익숙합니다.
평일에 서울에 머물며 사무실로 출근하거나(보통은 재택으로 일하지만, 단기계약된 회사로 출근하는 날이 있습니다) 미팅이 생겨 외출하는 제 모습이 조금 낯설어요. 말끔하게 씻은 후 화장을 하고 잠옷이 아닌 옷을 입은 제가 특별하게 여겨지기도 해서, 엘리베이터에서 인증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날은 오늘처럼 ‘세수 안 한 얼굴 + 감지 않아 떡진 머리 + 정체 모를 얼룩이 묻어 있는 잠옷’을 장착한 상태니까요. 작가님은 저를 바지런한 사람으로 알고 계실 텐데… 제가 알토란 같다고 알토란을 미들 네임으로 추가해 ‘김 알토란 미리’라고 불러주시기도 했는데… 작가님이 제게 갖고 계신 그 이미지를 지켜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제 실상이 이렇습니다.
여기까지 쓰고 씻고 왔습니다. 윗줄에서보다 조금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당시 저는 작가님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 출근할 필요가 없는 프리랜서들의 하루는 모두 다를 테니 제 일상이 궁금하셨던 거겠죠. 단번에 그럼요,라고 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제가 퇴사 2개월 차, 신입 프리랜서였기 때문입니다. 회사원으로 사는 12년 간의 습관, 그러니까 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씻고, 비슷한 모습으로 출근했던 습관이 여전히 남은 상태요.
그로부터 반년이 흘러 11월 중순이 되었습니다. 지금 작가님이 그 질문을 다시 하신다면, 저는 다른 답변을 드리게 될 것 같아요. “아니요, 이삼일 씩 씻지 않는 일도 흔한 걸요.”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누운 상태로 업무 연락을 확인하다가, 컴퓨터 앞에 불려 와 앉고, 컴퓨터를 동료 삼아 점심을 먹고, 그 채로 오후를 맞고, 마감시간에 쫓기며 야근을 하다가, 정수리 냄새를 풍기며 다시 침대로 향하는 하루… 최근의 제 일상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하루는 언뜻 보면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자유롭지 않더군요. 그래서 작가님의 질문이 다시 떠오른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씻냐,는 질문이 단순히 위생이나 부지런함에 관한 질문이 아니었단 걸 이제야 어렴풋이 느낍니다. 무한한 자유, 틈틈이 스미는 불안, 결코 균일하지 않은 일의 파도 앞에서 자신을 잘 돌보면서 주체적으로 일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웰컴 투 프리랜서 월드!’라는 작가님의 인사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편지를 쓰며 찾아보니 프리랜서는 ‘자유로운’이라는 의미의 ‘free’와 말을 탄 무사들이 쓰던 ‘긴 창’을 말하는 ‘lance’가 합쳐진 말이라고 하더군요. 특정 영주에게 속하지 않고 계약관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싸우는 창기병을 지칭하던 말이라고 해요. 중세 시대 용병인 프리랜서들이 전투에 나서기 전 모습은 어떨지 상상해 봤습니다. 자신의 창을 갈고닦고, 갑옷을 정비해 입고,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해 사기를 올리기도 하겠지요(‘왕좌의 게임’에서 봤던 여러 장면들이 떠오르네요). 현대의 프리랜서인 저는, 일의 세계로 나서기 전 어떤 모습인지 되짚어봤습니다. 창과 갑옷 대신 손에 익은 컴퓨터와 몸에 익숙한 책상, 의자를 준비하고 살핍니다. 여기까진 엇비슷한 것 같아요. 문제는 ‘공격!’ 하는 신호를 들으면 ‘나가자아아악! 싸우자아아아악!’하고 용맹하게 달려 나가야 하는데, 그 기세가 부재한 상태라는 거예요. 방금 전까지 잠의 세계에 있었는데 순식간에 일의 세계로 건너뛰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뿐인가요. 공격 신호도 듣지 못한 채 전장 한가운데 끌려 나온 저는, 후퇴 신호 또한 듣지 못한 채 홀로 싸움을 이어가기도 해요. 그러다 새벽이 되어서야 패잔병처럼 다시 침대로 가서 쓰러지죠.
이렇게 쓰고 보니 집에서 혼자 일하는 제게도 출근과 퇴근의 관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과정이 그 관문으로 적합할 것 같아요. 회사원이던 시절에 지금 제가 쓴 이 문장들을 봤다면 아주 크게 웃었을 것 같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샤워하고 옷 갈아입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집에 있는다고 너무 배부른 소리 하는 거 아니야?” 하면서요. 그렇지만 이제는 인정해야겠어요. ‘문 밖으로 나갈 일이 없음’, ‘타인과 얼굴을 마주할 일 없음’, ‘씻고 옷 갈아입을 시간에 일을 더 할 수 있음’과 같은 논리로 무장한 생활인의 자아를 이겨내기에, 1년 차 프리랜서인 자아는 아직 나약하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작가님께 선언합니다. 2023년의 남은 1개월 반, 아침에 필히 목욕재계 후 거실로 출근하겠습니다! 혼자 결심했다가는 조용히 없었던 일로 할 것 같아서 편지에 적어, 작가님께로 보내요. 프리랜서 선배로서 다른 꿀팁이 있다면 부디 전수를 부탁드립니다.
이왕 이야길 꺼낸 김에 제 구린 면모를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 봐요. 사실 저는 요즘 계속 무기력한 상태입니다. 여태 누구에게도 말을 안(못) 했지만 말이에요. 실은 저도 이 무기력의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어서,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어요. 하고 싶은 일 하겠다며 동네방네 소문내며 퇴사한 게 고작 몇 달 전인데, 벌써 이런 이야길 한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말이죠.
저와 가까운 이들은 벌써부터 눈치를 챘던 것 같아요. 2주 전 주말에 친구들이 수풀집에 놀러 왔었거든요. 그렇게 다 같이 모인 건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저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어요. 월요일 아침까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밀려 있었거든요. 저는 컴퓨터 지박령이 되어 앉아 있고,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수풀집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올해는 양파 안 심어? 추워지기 전에 심었던 것 같은데.”마당을 정리하던 친구가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어요.
“심으려면 이번 주에 심어야 되는데,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올해는 건너뛰지 뭐…”저는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대답했고요.
“우리끼리 심을게! 저기 심으면 되지?”
“아냐, 모종도 안 사다 놨어. 덕유산이나 전주에 놀러 갔다 와. 내가 그때까진 진짜진짜 마칠게.” 저는 그제야 친구를 돌아보며 대답했어요.
“아냐, 읍내 가서 사 와서 심을게. 너는 일하고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