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인기척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아기 고양이들이라 사진 한 장으로도 남기지 못했지만 제 마음속에는 지금도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이에요. 아름답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닐 텐데, 일렬종대로 할머니의 보폭에 발맞춰 따라가는 고양이들. 제가 다가가면 재빨리 흩어지는 아가들이 할머니가 “이리 온나~” 하고 다시 걸어가면 신속하게 여기저기서 일렬로 모여요. 할머니가 밭에서 흙을 만지는 동안 이쪽 밭 저쪽 밭에서 곤충, 풀과 신나게 돌다가 할머니가 일어서면 다시 모여 쫄래 쫄래 따라가지요. 이 고양이들은 할머니댁 마당 곳곳을 제 집처럼 누벼요. 지나갈 때마다 마당 한 중간에 배를 내고 누워있거나 식빵을 굽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죠. 그러다 제가 가까이 가면 쏜살같이 담장으로 구석으로 숨고요. 이곳의 고양이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팔자가 좋았던 건 아니에요. 영리한 고양이 “나비” 덕분이었어요.
슈퍼집 할머니(지금은 운영하지 않으시지만 모두가 슈퍼집이라고 불러서 저도 그리 부르게 되었어요)댁 주변엔 늘 뚱뚱한 고양이 한마리가 있었어요. 허리가 다쳐 한 걸음 내딛는대도 오분은 족히 걸리는 슈퍼집 할머니가 대문을 나서 발치에 닿을 평상에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나비야~" 하고 부르면 어디선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고양이였죠. 앙칼진 저희집 강아지 마루가 다가가면 보통의 고양이들은 내빼고 없는데 나비는 달랐어요. 왈왈 짖는 마루가 싫긴 해도 할머니가 부르면 곁에서 자리를 지키는 친구였죠. 나비는 다른 할머니들이 부르면 오지 않고 슈퍼집 할머니가 불러야만 어디서든 쏜살같이 튀어나와서 마을 할머니들이 참 기특하다고 했어요. 슈퍼집 할머니는 그런 나비가 예뻐서 한 걸음 걷기 조차 쉽지 않은 몸으로 매일 나비의 밥을 챙겨주러 나오셨고, 그 김에 평상에 앉아 마을 할머니들과 담소를 나누셨지요. 나비 이야기로 담소가 시작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고요.
어느 날, 마을의 한 어르신댁 고양이가 새끼를 여덟이나 낳았단 소문이 돌았어요. 영리하고 순한 나비 때문에 고양이의 매력에 단체로 푹 빠지게 된 마을 할머니들은 여느 해와 달리 고양이를 모두 분양받기에 이르렀죠. 그렇게 마을 어르신 사이에 1집 1고양이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둑이네 할머니는 물론, 앞집 할머니가 분양받은 고양이도 꼬꼬마 시절부터 할머니의 마당 동선을 따라 쫄래 쫄래 따라다녔어요. 고양이들이 어찌나 할머니들을 잘 따르는지 처음엔 개냥이 DNA가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건 영리하고 귀여운 고양이, 나비와 슈퍼집 할머니가 한 일이더라고요. 사람도 동물도, 눈빛만 봐도 직감적으로 알잖아요.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나비가 슈퍼집 할머니와 지내는 모습을 보며 마을 할머니들 속에 고양이에 대한 마음의 철옹성이 무너졌고, 때문에 할머니들이 지나가는 고양이들에게 보내는 시선조차 살가울 수밖에 없던 거죠. 덕분에 여기 산북의 고양이들이 유독 어르신을 잘 따르게 됐고. 제 일상 속에서도 귀여운 장면을 자주 볼 수 있게 된 거예요.
몇 달 뒤 산책길에 낯익은 얼굴의 고양이가 마을 입구의 도로 옆에서 자고 있었어요. 인기척에도 계속 자는 고양이가 살아 있을 리 만무하지만 고양이의 표정이 너무나 편해서 정말 자는 것 같았어요. 실은 잠든 것이길 바랐어요. 배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죽었다기엔 피를 머금지도,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하얗고 까만 털이 반짝이고 있었거든요. 바람과 달리 갑자기 동생이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수습할 때마다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따뜻한데 너무 가벼워”
“죽은 지 오래돼서 굳었어”
“딱딱하고 무거워서 옆으로 밀어뒀어”
그저 먼 발치에서 보기만 했는데도 그런 이야기는 잔상이 참 오래갔어요. 고양이의 배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비겁하게도 그 잔상이 먼저 떠올라 머뭇머뭇거렸죠.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나비야~”
슈퍼집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있었어요. 이틀째 나비가 불러도 안 온다고. 마을 사람들이 저기에 나비가 죽은 것 같다고, 차에 치여 죽은 게 아니고 산책 가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편안하게 갔다는데 몸이 이래서 확인하러 갈 수도 없다고 하셨어요. 저에겐 뛰어서 1분이면 거리가 할머니에겐 가다 쓰러질 수도 있는 거리였으니까요. 그래도 혹시나 그 고양이가 나비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불러보는 거라고 하셨어요.
집에서 평상까지 일 미터가 채 안되는 거리도 어렵게 움직이던 할머니는 그날 이후 평상에 자주 나오지 못하셨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조용한 평생을 지나칠 때마다 그날 나비의 모습이 떠올라요. 편안해 보였던 얼굴과 달리 정말 편안하게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건, 도로 위에서 다치거나 죽은 동물들을 수 없이 봐왔기 때문이죠. 고양이뿐만 아니라 고라니와 사슴, 너구리, 개, 뱀, 수달, 어떤 동물인지, 하나였는지 둘이었을지 알아볼 수조차 없는 피투성이 잔해들까지. 도심에서 한참을 들어와야 하는 깊은 시골이라 그럴까요? 고속도로도 아닌 여느 시골길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이는 로드킬을 보며 생각해요. 어쩌면 자연사보다 로드킬이 많겠구나.
작가님의 편지를 읽으며 "여기 이곳엔 그래도 이렇게 사랑받는 고양이들이 있어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하고요. 그런데 쓰고 보니 어느새 저 역시 슬픈 결론으로 향하게 되네요.
하꼬처럼 뜬장에 사는 강아지들을 직접 본 적은 아직은 없다고 쓰다가도 결국 슬픔이 떠올랐어요. 1미터 남짓한 목줄과 제 몸 간신히 뉠 듯한 얇고 좁은 집. 이불 한 채 없이 나는 겨울. 파리 꼬인 냄비 속 음식물과 언제 갈아주었을지 알 수 없는 물, 그 옆에 똥, 오줌이 널브러진 환경에서 사는 개들이 대부분이니까요. 그 슬픔 속엔 그럼에도 꼬리를 흔들며 간식을 받아먹던 개가 사라졌을 때의 허망함, 같은 자리에 새로운 강아지가 짧은 목줄을 메고 꼬리를 흔들 때의 분노,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짧은 정을 주는 미안함도 있죠.
하꼬와 작가님의 산책 시간을 상상했어요. 하꼬의 살랑이는 꼬리, 킁킁이는 코, 뜬장에서는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을, 쭉 뻗은 다리와 작가님의 보폭을 따라 신난 걸음걸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보는 주변 어르신까지도요. 그 장면이 더러는 불편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달리 보는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나비와 슈퍼집 할머니의 유대를 달리 보던 이곳의 할머니들처럼요. 비록 지금 나비는 없지만, 나비 덕분에 여기 이 산북 할머니들에게 고양이는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었듯이 작가님과 하꼬의 산책이 누군가의 마음 속에 작은 변화의 균열을 만들어줄거라 생각해요. 여기 산북에서도 언제부턴가 마을 산책길에 간식과 심장사상충약을 챙겨주던 강아지들의 집이 커지거나 목줄이 길어지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거든요! 그것도 꽤 자주요! 그럴 때마다 어르신들의 마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것 같아 기뻐요. 물론 그 균열만으로 강아지와 고양이들의 외로움과 생존을 온전히 구원할 수 없겠지요. 그래도 강아지와 고양이들에게 종종 나의 안부를 묻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혼자 있을 때에도 따스한 위로가 된다면, 의미 있는 일 아닐까요?
제게 10월은 주변 사람 생각을 하는 달이었어요. 그 중엔 작가님이 큰 부분을 차지했고요. 종종 안부를 묻는 마음에 대해서도 한참 생각했습니다. 작가님은 아무 일 없는 날에도 “잘 회복하고 있나요?” “몸은 어떤가요” 하고 안부를 건네셨잖아요. 사실 저는 기본적으로 좀 무뚝뚝한 데다, 사람 말을 잘 안 믿다 보니, 남들이 하는 칭찬이나 좋은 말일수록 으레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왔거든요. 실망하기 싫고, 상처받기 싫은 일종의 방어기제였지요. 근데 이번 사고로, 정확히는 작가님의 안부 문자 때문에 그 방어벽이 무너졌어요. 작가님이 이따금 물어온 안부들, “잘 지내고 있나요?” “정말 다행이에요” 적고 보니 별거 아닌데, 이 평범한 말들에 눈물이 나더라고요. 나의 무탈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어 뭉클했나 봐요. 고마웠어요. 이런 방어적인 인간에게 지치지도 않고 마음을 내어줘서. 작가님의 따뜻함을 자주 떠올린 덕분에 불안을 안고 살던 제가 걱정 없이 말랑한 사람이 되어 쉴 수 있어요. 그래서 하꼬도 짜장이도, 희망이도, 수풀집을 다녀간 이름 모를 수많은 동물 친구들도, 저처럼 작가님이 잠시 내어주신 온기로 혼자있을 때에도 따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보내주신 사진 속에는 벼가 노랗게 익었던데, 여기 산북의 논은 어느덧 헐빈해졌어요. 산책길의 낙엽은 수분기 없이 바짝 말라 밟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나고요. 아쉬운 마음이 들려는 찰나에 아주 기쁜 소식이 있어 공유하자면, 10월 25일에 심은 삼동초씨가 오늘 보니 빼곡하게 발아했다는 거예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샐러드 재료인데, 그간 매번 타이밍을 놓쳐서 3년째 발아에 실패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딱 맞춰 발아까지 성공 시켰으니 내년 2월 즈음 무럭무럭 돋아나는 삼동초를 뽑아다 샐러드도 해먹고 된장국도 해먹고 겉절이도 해먹을 생각에 벌써 설렙니다. 3월엔 노오란 유채꽃(삼동초에서 피는 꽃이 유채꽃이에요!)도 빼곡하게 필 테고요. 이 편지를 다 쓰고 빼곡히 발아한 귀여운 삼동초 사진을 보내며 안부를 물어야겠어요. 이듬 해엔 여리고 푸릇한 샐러드와 유채꽃으로요. 작가님이 늘 하시는 다정한 말처럼 저도 불쑥 문자할게요! 다음 문자까지 무탈하시기예요!
2023.11.2
삼동초가 빼곡하게 핀 그리고다에서 귀찮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