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는 침실에 누워 창 밖 호두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당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져 얼른 현관으로 달려 나갔어요. 수풀집은 인터폰도, 초인종도 없는 집이라 낮엔 대체로 대문을 열어두거든요. 손님들은 앞마당에 서서 ‘계세요?’를 크게 외치거나 (일부러) 큼큼 헛기침 소리를 내어 집주인을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 예상대로 마당에는 손님이 와 계셨어요. 김이 나는 소쿠리를 손에 든, 마을 어르신이요. 어르신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딜 주고받다 보니 소쿠리는 어느새 제 손으로 옮겨와 있었습니다. 아가씨 입맛에는 어떨는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요.
어르신과 뒷마당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연보랏빛 꽃을 풍성하게 피운 층꽃을 자랑하고, 요즘 제 속을 썩이는 새로운 잡초 ‘개여뀌’의 존재도 일러 받쳤어요. 한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 어르신이 조심스레 입을 떼셨어요.
“저기… 고양이들 밥 말이야. 이제 주지 말어. 응?”
어르신의 시선이 마당 한편의 고양이 밥그릇에 닿았습니다. 동네고양이들을 위해 마련한 고양이 급식소에 말입니다. 고양이들이 가을 농사가 한창인 텃밭을 헤집어 놓는 데다, 여기저기 똥오줌을 누고 다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제가 없는 날, 그러니까 마당 급식소에 밥이 떨어진 평일에는 고양이들이 텃밭에 오지도, 말썽을 부리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도요. 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 채 허허 웃다가 어르신을 대문 앞까지 배웅하고 들어오는 길입니다.
이 마음을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다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혼자 끙끙대지 않고 작가님께 편지를 적기로 했어요. 시골에 살아서 좋은 순간도 많지만 시골에 살기 때문에 겪는 슬픔도 적지 않다고 스치듯 말했을 때, 고갤 끄덕이던 작가님의 얼굴이 떠올랐거든요. 아, 요즘은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는 게 아니라, 슬픈 사람이 둘이 된다고 한다면서요? 그래서 조금 망설였어요. 작가님이 잘 감당하고 있는 시골살이의 슬픈 단면을 제가 풀무질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러다 생각했습니다. 함께 길 잃은 슬픔 속을 헤매다 보면 다른 감정으로도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 편지는 제 시골살이 슬픔 속을 함께 헤매보자는 일방적 초대입니다.
어르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고, 그 입장을 이해합니다. 고양이들이 수풀집에서도 꽤 말썽을 부리거든요. 애지중지 키운 꽃의 꽃대를 똑 부러뜨리기도 하고, 돌담 옆 작은 구멍을 출입구로 사용하다가 담장을 와르르 무너뜨리기도 했습니다. 막 씨를 뿌린 텃밭을 헤쳐 놓기도 하고, (인간 기준) 그래선 안 되는 곳에 당당히 똥을 싸놓기도 하거든요. 저는 주말 이틀만 이곳에 머물고, 농사를 생업으로 하지 않는데도 고양이들의 말썽이 종종 버거워요. 그런데 마을 어르신들은 오죽하시겠어요. 곳곳에 밭과 논을 돌며 종일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는데, 집 앞 텃밭 마저 고양이들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말이에요. 고양이들이 나타나면 소릴 지르고 발을 굴러 쫓아내시는 마음……. 모를 수가 있나요. 어르신이 오신 김에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이 이야길 꺼내시려고 몇 번이나 생각하시다 소쿠리에 따순 음식을 담아 애써 발걸음을 하셨을 거예요.
“네, 이제 안 줄게요.” 시원하게 답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색한 표정으로 허허 웃으며 “이제 조금만 줄게요.” 답하고 배웅을 했습니다. 제 슬픔의 기원은 ‘이제 고양이 밥 주지 마라’는 어르신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일에 처음도 아닌 데다 어르신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사실 제가 슬픈 것은 저 때문이에요. 어르신의 고단함을 아는 제 마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사료를 부어주는 제 마음이요.
이곳에서 처음 만난 고양이는 까만 고양이 ‘구석이’ 예요. 폐가였던 수풀집의 리모델링 공사를 막 시작했을 때, 마당 구석에서 나타나 구석이라 이름 붙였어요. (저는 모든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여야 속이 시원한 작명애호가거든요.) 공사 현장 간식으로 준비했던 구운 달걀 하나를 잘게 잘라 줬더니, 허겁지겁 먹고 사라졌어요. 그 뒤론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엔 몰랐는데, 무너지고 망가진 수풀집이 구석이의 집이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공사를 시작하며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니, 어쩔 수 없이 영역을 떠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동네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부어주는 이유, 마당 한 편을 고양이의 출산과 육아를 위해 내어 주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저보다 먼저 그들의 조상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이 수풀집 마당과 텃밭을 침범한 게 아니라, 제가 그들의 삶에 침입한 침입자니까요.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하면서 여러 걱정도 생겼습니다. 일주일에 겨우 이틀, 비정기적으로 밥을 주는 게 과연 고양이들에게 이로운 일일까. 자연의 생태 시스템에 개입하여 균형을 망가뜨리는 게 아닐까. 중성화 수술까지 해 줄 여력은 없는데 개체 수가 너무 늘어나지 않을까.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웃들도 있을 텐데, 피해를 주거나 다툼이 생기지 않을까. 만약 마당에서 아픈 고양이를 마주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밥을 주고 이름을 붙이는 일에는 수많은 걱정과 책임감이 따라왔습니다. 그 감정들이 어느 밤엔 저를 집어삼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매정하게 밥 주기를 멈추기도 했어요. 그러다 마당에서 앙상한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는 고양이를 마주치는 날엔 무척 속이 상했습니다. 통통한 몸을 주욱 펼친 채 침대에서 쿨쿨 자고 있는 소망이와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라서요.
그런 제가 마음을 정한 것은 지난 겨울입니다. 매서운 추위가 두꺼운 패딩도 파고들던 날이었어요. 여섯이었던 아기 고양이 형제가 둘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손바닥만 한 고양이가 의지할 곳이라곤 꼭 저만한 형제 고양이의 체온뿐인 것 같았어요. 순간 길에서 겨울을 나는 고양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탈수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얼른 물을 준비해 나왔는데, 얼마나 추웠던지 따뜻한 물에 금방 살얼음이 끼었어요. 저는 소망이의 사료 중 가장 고영양인 사료를 꺼내왔습니다. 사료를 주고 멀찍이 물러서자 둘 중 먼저 용기를 낸 고양이가 달려와 먼저 맛보고는 다른 고양이를 향해 삐약거리기 시작했어요. 이리 와서 같이 먹잔 신호 같았어요. 쭈뼛쭈뼛하던 형제 고양이도 곧 달려왔거든요.
대접에 째끄만 머리를 박고 정신없이 사료를 먹는 두 고양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작은 고양이들에게는 매일이 삶과 죽음의 기로겠구나. 작가님! 저는 이 작은 고양이들을 다음 주에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을 했어요. 당연한 사실이지만 살고 죽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이니까요. 그때 생각했어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요. 추운 겨울날 한 번씩 더운 물을 부어주는 일, 어떤 주말은 고양이가 쉽게 얻는 밥을 주는 일을요.
그 뒤로 몇몇 고양이들이 수풀집 마당을 오갔습니다.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 것처럼 작별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어요. 저희 집에 사람 기척이 나면 제일 먼저 달려오던 짜장이는, 언젠가부터 저희 집에 놀러 오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에 누군가 놓은 덫에 고양이 한 마리가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 오는 날 마당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희망이는, 제 침실에서 고양이별로 떠났습니다. 어떤 녀석은 도시로 입양을 가기도 했지만, 많은 고양이들이 이곳에서 다치고, 아프고, 죽습니다. 특히 아기 고양이일 때는요. 여섯에서 둘이 되어 버렸던 고양이 형제는 어느 날 모두 사라졌습니다. 자연 자체도 험하지만, 사람들이 농사를 위해 논과 밭에 뿌리는 화학약품들이 큰 위협이 되는 것 같아요. 자연 상태에서 고양이가 사냥할 다른 동물들을 인위적으로 소멸시키는 데다, 고양이도 농약에 중독되어 죽게 만드니까요. 로드킬도 적지 않고요. 어렵게 살아남아 성묘가 되어도, 한 영역 안에서 여러 고양이가 평화롭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고양이들은 자주 영역싸움을 하고, 싸움에서 진 고양이는 다쳐서 죽거나 새로운 영역으로 이주해 가요.
수풀집에는 여전히 여러 동물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동네 고양이들을 비롯해서, 땅 속을 오가는 두더지, 가끔 처마 밑에 둥지를 트는 딱새와 제비 가족, 돌담에서 튀어나와 저를 놀라게 만든 뱀, 화단과 텃밭을 찾아드는 수많은 곤충들까지요. 저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대문 밖에는 더 많은 동물들이 있어요. 산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우는 고라니(처음엔 ‘웬 여자가 이 밤에 소릴 지르지?‘ 생각했어요), 가끔 산 아래로 내려와 텃밭의 작물들을 서리해 가는 오소리(저희 집 작물들은 탐내지 않는 것을 보니, 앞으로도 농부로서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을 하천에서 만나는 백로(왜가리, 두루미, 황새일 수도 있어요. 만날 때마다 그 차이점을 인터넷에 검색해보기는 하는데요. 매번 잊고 그냥 ‘백로다!’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가장 흔히 보는 동물은 개입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시골 개들은 도시에서 보던 친구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으로 삽니다. 그것이 또 다른 제 슬픔입니다.
이곳의 많은 개들이 뜬장에 삽니다. 뜬장은 말 그대로 공중에 띄워진 장이에요. 얇은 철망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장이요. 뜬장에 사는 개들은 편히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습니다. 철망이 발바닥을 파고들고, 쉽게 상처를 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뜬장에서 개를 키우는 이유는 매일 똥오줌을 치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래요…… 뜬장 아래는 개가 싼 똥이 쌓이는데 그마저도 치워주지 않아 뜬장의 위로 솟아오르고, 습한 날엔 곰팡이가 피기도 해요. 개는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요. 추위와 더위와 싸우면서요. 그러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 자리는 새로운 개로 채워져요. 작가님이 사시는 그리고다 근처에는 부디 이런 장면이 없기를 바라고 있어요. 시골에 산다는 건 이런 모습을 자주 마주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뜬장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 작가님이 매일 슬프지 않기를요. 마루와 함께 뜬장에 사는 개를 지나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요.
지난달, 작가님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고였다’라는 작가님의 말을 듣고 나서, 그 눈물의 의미가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산다는 것은 잘 떠나보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 곁에 이별이 많이 쌓이잖아요.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이별은 늘어간다*는 노랫말처럼요. 특히 삶과 죽음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소중한 이들이 곁에 오래 머물러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제 다시 태어난 것과 같으니 다음에 만나면 케이크를 먹자는 작가님에 카톡을 보며 웃을 수 있어 정말,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해요. 우리 맛있는 케이크 먹으러 가요.
저는 이따 오후에도 뜬장에서 지내는 개, 하꼬(가명)와 산책을 다녀올 거예요. 산책을 나설 때마다 이게 정말 하꼬를 위한 일일까 생각합니다. 잠시의 행복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다시 갇히는 고통을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또 가요. 오늘이 하꼬와의 마지막 산책이 아니기를, 오늘 저와 걷는 길이 하꼬가 만난 세상 전부가 아니기를, 이 가을이 하꼬의 마지막 가을이 아니기를 바라면서요. |